항목 ID | GC09200566 |
---|---|
한자 | 世居 姓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동재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하여 살고 있는 성씨.
[개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발생한 근원은 고대 중국의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왕족을 중심으로 일반 백성과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호칭이 성(姓)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범위가 확대되어 귀족들도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 제도가 타파되면서 인구의 거의 전부가 성씨를 가지게 되었고, 1909년(순종 3)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모든 국민이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금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금산군은 금산(錦山)과 진산(珍山)이 합해져서 형성되었다. 이 중 금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김(金), 한(韓)이 있고, 진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김(金)이 있다. 금산 김씨는 김신(金侁)[?~1274]이 충렬왕 때 지금주사(知錦州事)로 부임하여 장원으로 하사받은 금산에서 거처한 후, 후손들이 김신을 시조로 삼고 금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금계 한씨[금산 한씨]의 시조 한교(韓曒)[1337~1401]는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의 15세손으로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하여졌다. 이에 그 후손들이 한란을 시조로 삼고 금계를 본관으로 하였다. 진산 김씨는 김해 김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김천석(金天錫)[1404~?]이 1464년(세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교리, 춘추관제학,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훗날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자 후손들이 김천석을 시조로 삼고 진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금산의 성씨 변화]
금산의 성씨 변화는 국가의 공식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산군읍지(錦山郡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진산군읍지(珍山郡邑誌)』, 『진산군여지승람(珍山郡輿地勝覽)』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금산의 성씨에 대한 기록은 삼국 시대부터 고려 후기까지는 기록이 없어서 살펴볼 수가 없다. 금산의 성씨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금산군 성씨조에 금산의 토성으로 김(金), 한(韓), 이(李), 손(孫), 양(梁) 등 다섯 성이 기록되어 있고, 촌락성(村落姓)으로 백(白)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리(富利)에는 황(黃), 장(張), 정(程), 배(裵), 임(任) 등 다섯 개의 토성이 기록되어 있고, 대곡(大谷)에는 하(河), 석(石), 정(鄭), 이(李), 유(柳), 안(安), 황(黃), 박(朴) 등 여덟 성씨와 함께 속성(續姓)으로 정(丁)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성(安城)에는 최(崔), 양(梁), 송(宋), 이(李) 등 네 개의 성씨, 그리고 횡천(橫川)에는 손(孫), 김(金) 등 두 개의 성씨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고 80여 년이 지난 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세종실록지리지』와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고, 다만 속현이었던 부리에서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부리의 황(黃), 장(張), 정(程), 배(裵), 임(任) 등 다섯 성씨에 하(河), 석(石) 등 두 개의 성씨가 새롭게 추가되었고, 성씨의 순서가 정(程), 임(任), 황(黃), 장(張), 배(裵), 하(河), 석(石)으로 바뀌었다. 이는 토착 세력의 판도가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새롭게 등장한 하(河)와 석(石)의 경우도 대곡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서 새롭게 이주한 성씨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금산 지역에는 더 많은 성씨가 등장한다. 조선 후기 읍지류 등에서는 토성과 속성의 구분이 없어지고, 몇몇 새로운 성씨가 기록되었다. 1793년에 편찬된 『금산군읍지』에서는 기존의 김(金), 한(韓), 이(李), 손(孫), 양(梁), 백(白), 정(程), 임(任), 황(黃), 장(張), 배(裵), 하(河), 석(石), 하(河), 석(石), 정(鄭), 박(朴), 최(崔), 정(丁) 외에도 새로운 성씨로 전(全), 길(吉), 성(成), 조(趙), 서문(西門), 임(林) 등이 등장한다.
진산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성으로 하(河), 진(陳), 장(蔣), 변(邊), 문(文)[어떤 책에는 門] 다섯 성씨가 기록되어 있고, 속성(續姓)으로 박(朴), 김(金) 등 두 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완산(犺山)에는 손(孫), 고(高), 제(提, 堤), 김(金) 등 네 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고, 속성(續姓)으로 지(池)가 기록되어 있다. 금암(金岩)에는 정(鄭), 김(金), 명(明) 등 세 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진산 성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변화가 보인다. 토성은 변화가 없으나 속성(續姓)에서 이(李)가 추가되고, 완산(犺山)의 성씨였던 김(金)이 속성(續姓)에 추가되었으며, 금암(金岩)에는 김(金) 대신 전(全)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횡정(橫程)에는 고(高), 박(朴), 김(金), 이(李) 등 네 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 진산군조에서는 토성과 속성을 구분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며, 정(鄭)과 오(吳), 양(楊), 안(安), 최(崔) 등 다섯 성씨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후의 읍지인 『호남읍지』[1871], 『호남읍지』[1895] 등 다른 기록들은 『여지도서』의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이후의 성씨 변화를 추측하기가 어렵다.
통계청이 2015년에 발간한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성씨·본관 편에 따르면, 금산군에 살고 있는 성씨는 감(甘)을 비롯하여 116개 성씨이고 전체 인구는 5만 4252명이다. 이 중 김(金)이 1만 2429명으로 가장 많이 사는데, 그중 김해 김씨가 5,930명이고 금산 김씨가 377명이다. 이(李)는 6,710명으로 그중 전주 이씨가 2,545명이고, 경주 이씨가 1,826명, 벽진 이씨가 201명이다. 박은 5,152명으로 그 가운데 밀양 박씨는 3,316명이고, 반남 박씨는 1,245명이다. 최는 2,547명으로 그 가운데 경주 최씨는 1,349명이고, 전주 최씨는 575명이다. 정(鄭)은 2,040명으로, 그 가운데 하동 정씨가 529명이고, 동래 정씨는 342명이며, 영일 정씨는 316명이다. 전(全)은 1,223명으로 그 가운데 전안 전씨가 739명이고, 옥천 전씨가 304명이다. 강(姜)은 1,209명으로 그 가운데 진주 강씨가 1,197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길은 1,418명으로 그 가운데 해평 길씨가 1,349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은 1,038명으로, 그 가운데 청주 한씨가 938명이고, 금계 한씨[금산 한씨]가 7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