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70 |
---|---|
한자 | 錦溪 韓氏 |
이칭/별칭 | 금산 한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범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37년 - 한교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01년 - 한교 사망 |
성씨 시조 | 한교(韓曒) |
[정의]
한교를 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세거 성씨.
[개설]
금계 한씨(錦溪韓氏)[금산 한씨]의 시조는 한교(韓曒)[1337~1401]이다. 한교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시조(始祖) 한란(韓蘭)의 15세손으로, 금산군수 심고(沈暠)의 데릴사위가 되어 개경에 가서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보문각직제학에 올랐다. 특히 한교는 효행(孝行)이 남달랐는데,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희종(熙宗)이 좌리공신에 임명하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한교를 시조로 삼고 금계(錦溪)를 본관으로 하여 금산(錦山)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명종(明宗) 때 고향에 효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지고 금산의 향사에 제향되었다고 한다.
[연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금산군 성씨조(姓氏條)에 금산군의 토성으로 ‘한(韓)’이 기재되어 있다.
[입향 경위]
한교는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태어났다. 금산군수인 심고가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린 한교를 데리고 가서 키워서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1360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직제학에 올랐고, 공민왕(恭愍王)과 우왕(禑王), 창왕(昌王)을 보필하였다. 한교는 특히 효행이 남달랐는데, 19세 때에는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파악하고 손가락을 자른 피를 드시게 하여 회복시켰으나 결국 돌아가시자 취암산(鷲巖山)에 안장하고 3년간을 시묘하였다. 이에 한교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한교가 사는 동네를 ‘효자리’라 불렀고, 희종이 한교를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임명하고, 고향의 이름을 따 금계군에 봉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한교를 시조로 삼고 금계를 본관으로 하여 금산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명종(明宗) 때 고향에 효자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지고 금산의 향사에 제향되었다고 한다.
[현황]
2015년 통계청에서 발간한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성씨·본관 편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금계 한씨는 모두 1,405명이고, 금산 한씨는 1,122명이다. 이 중 금산군에 살고 있는 금계 한씨는 7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