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01
한자 韓皦
영어공식명칭 Han Gyo
이칭/별칭 명보(明甫),회묵재(晦黙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종교/유교
유형 인물/문무 관인,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37년연표보기 - 한교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01년연표보기 - 한교 사망
사당|배향지 유곡사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서원모정길 54-8[하류리 315-2]지도보기
성격 문신|효자
성별
본관 금산(錦山)
대표 관직 보문각직제학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고려 후기 문신이자 효자.

[개설]

한교의 본관은 금계(錦溪)[錦山], 자는 명보(明甫), 호는 회묵재(晦黙齋)이며, 금산 한씨(錦山 韓氏)[금계 한씨(錦溪 韓氏)]의 시조이다.

[활동 사항]

한교는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의 15세손이다. 『여지도서』 인물조에 의하면 고을 사람 한우(韓佑)의 아들인데, 군수 심고(沈暠)가 신이한 꿈을 꾼 후 한교가 태어나자 훗날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1360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으며, 공민왕(恭愍王)·우왕(禑王)·창왕(昌王)을 보필하였다.

한교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19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였으나 낫지 않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어머니의 입으로 흘려 넣음으로써 수개월 동안 연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며 3년 상을 치르니 효행이 주변에도 널리 퍼져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효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침입하여 군읍이 모두 화를 당하였는데, 한교가 살았던 마을에 이르러서는 효자비를 보고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고려 시대에 효자정문(孝子旌門)과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금계군(錦溪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유곡[현재 금성면 하류리 버드실]에 정려를 건립하였고, 1554년(명종 9)에 문충의 시호를 받았으며, 1664년(현종 4)에 유곡사(柳谷祀)를 창건하였다. 1702년(숙종 28)에 유곡사(柳谷祀)가 사액을 받았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비각거리에 한교의 효자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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