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69
한자 錦山 金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274년 - 김신 사망
세거|집성지 금산 김씨 집성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지도보기
성씨 시조 김신(金侁)

[정의]

김신을 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세거 성씨.

[개설]

금산 김씨(錦山 金氏)의 시조는 고려 시대 요양성 참정을 역임한 김신(金侁)[?~1274]이다. 김신금주군으로 봉해지고 장원으로 하사받은 금산에 귀향하여 살았으며, 후손들이 김신을 시조로 삼고 창본하였다. 금산군 남일면 일원에 금산 김씨 집성촌이 있다.

[연원]

김신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인 김정보(金正寶)의 13세손이다. 고려 원종 때 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원종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서 강서인주적(江西鱗州賊)을 토평한 공 등으로 요양성 참정이 되었으며, 귀국하자 조정에서 김신의 출신지인 부리현(富利縣)금주(錦州)로 승격하고 금주군에 봉하였으며,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신대리 일원을 장원(莊園)으로 하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김신을 시조로 삼았으며, 금주가 금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금산으로 하였다. 금산 김씨는 장수파(長水派), 남해파(南海派), 진주파(晉州派), 창녕파(昌寧派), 회령파(會寧派), 곡성남원파(谷城南原派), 고부파(古阜派), 금산파(錦山派)로 나뉜다. 김신의 첫째 아들 김세유(金世宥)는 부원수(副元帥)를 지냈고, 둘째 아들 김광유(金光宥)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대(代)를 이었다. 1370년(공민왕 19) 문과(文科)에 급제한 김지(金摯)는 김광유의 증손(曾孫)으로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를 거쳐 사의대부(司義大夫)와 좌사간(左司諫)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태종(太宗)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입향 경위]

김신이 충렬왕 때 지금주사(知錦州事)로 부임하며 장원으로 하사받은 곳에서 거처하면서 후손들이 계속 세거하게 되었다.

[현황]

2015년 통계청에서 발간한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성씨·본관 편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금산 김씨는 모두 1만 4052명이며, 금산군에는 377명이 살고 있다. 금산군 남일면에 금산 김씨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김신 등을 배향하였던 성곡서원(星谷書院)의 터가 있다. 금산 지역의 유일의 사액 서원이었던 성곡서원은 1613년(광해군 원년) 당시 금산군수 이안눌(李安訥)의 주도하여 고려 후기 문인인 율정(栗亭) 윤택(尹澤)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았던 진악산 아래에 창건하였고, 1617년(광해군 9) 군수 김원록에 의해 봉안되었다. 서원 건립과 함께 배향된 인물은 낙천재(樂天齋) 김신윤택, 야은(冶隱) 길재(吉再), 충암(冲庵) 김정(金淨), 의병장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 여섯 명이었다. 1663년(현종 4) ‘성곡서원’의 이름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나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는 밭으로 변하였다.

성곡서원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던 김신의 영정은 서원 철폐령 이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길재를 배향한 청풍사(淸風祠)로 옮겨 추배(追配)되었고, 1946년 후손들이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황풍사(皇風祠)[금산군 향토유적 제23호]를 창건하여 이배(移配)하였다. 1969년 황풍사 입구에 ‘만리황풍(萬里皇風)’이라 적힌 비석을 세웠으며,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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