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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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谷書院 - |
이칭/별칭 | 성곡서원지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개삼로 90-14[성곡리 84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영숙 |
건립 시기/일시 | 16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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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현 소재지 | 성곡서원 터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개삼로 90-14[성곡리 844]![]() |
성격 | 서원 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터.
[개설]
성곡서원(星谷書院)은 금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유일하게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이었다. 성곡서원이 건립되면서 고려 말의 요양행성참정(遼陽行省參政)을 지낸 낙천재 김신(金侁)과 율정 윤택(尹澤)[1289~1370], 야은(冶隱) 길재(吉再), 기묘사화 때 8현 중 한 사람인 김정(金淨),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 등 6명이 함께 배향되었다.
[위치]
성곡서원 터는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844번지에 있다. 금산읍 소재지에서 금산로를 타고 장수, 용담 방향으로 3㎞ 가면 종합 운동장이 나온다. ‘개삼터테마공원’ 이정표를 보고 약 1㎞를 더 직진한 다음 좌회전하여 700여 m 더 가면 개삼터테마공원이 나온다. 공원 주차장 입구에서 2시 방향 150여 m 전방에 보이는 밭과 산소에서 성곡서원 유허비를 찾을 수 있다.
[변천]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 의하면, 성곡서원의 건립은 광해군 초기인 1613년(광해군 5)에 많은 선비들의 요청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금산군수 이안눌(李安訥)[재임 기간 1611. 10.~1613. 11.]이 주도하여, 윤택이 1364년(공민왕 13)에 벼슬을 사직하고 금주(錦州)[현 금산군]로 내려와 진악산(進樂山) 아래 쌍화당을 짓고 독서와 저술에 힘썼던 곳에 건립하였다. 위치는 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진악산 아래이다. 1617년(광해군 9)에 금산군수 김원록(金元錄)[재임 기간 1613. 11.~1618. 1.]에 의해 봉안되었는데, 원기(院記)는 김원록이 지었고, 제영(題詠)은 이안눌과 서산군수 김대덕(金大德)[김원록의 아들]이 지었다.
1663년(현종 4)에 금산읍 유생 한수신(韓秀臣)이 상소하자, 현종은 예조좌랑 정동엽(鄭東燁)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성곡서원’의 이름으로 사액한 후 복호미 4결을 내려 주어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썼고, 학규(學規)는 초려 이유태(李惟泰)와 진보현감 이진병(李震炳)이 함께 지었다. 원규(院規)도 이유태가 지었다고 한다. 성곡서원에는 원장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훈도 1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지방 교육에 힘썼다. 삼남(三南)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 유림들이 전답을 헌납하여 풍부한 재정으로 지방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금산 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을 피하지 못하여 훼철되었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황]
성곡서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은 현재 밭으로 변해 있다. 유허비에 위치와 면적, 연혁 등과 함께 ‘김신·윤택·김정·길재·조헌·고경명의 6현을 배향한 서원지(書院址)이다. 광해군 9년[1617] 지방 유림에 의거 창건되었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서원의 자리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2023년 7월 성곡서원의 역사적 가치 조명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의의와 평가]
성곡서원은 금산 지역 최초의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 서원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