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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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이른 시기에 발달한 성리학과 다양한 형태의 선비정신을 갖춘 금산의 유교문화.
[고려 후기 성리학의 발흥과 금산의 유학자들]
성리학은 이기(理器)를 바탕으로 우주만물의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다루는 사상체계이다. 송나라에 이르면 한당 시기에 유행하던 훈고학풍에서 벗어나 점차 경학(經學)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유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북송의 주돈이에서 비롯되어 정호와 정이를 거치며 심화되었다. 남송 대에 이르면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이 점을 중시하여 성리학을 정주학 혹은 주자학이라고 부르며, 리(理)의 문제의식에서 나왔다고 하여 이학, 의리학, 심학 등으로 불렀다. 성리학에 고려에 전래된 시기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충렬왕 시기에 안향에 의해 원으로부터 수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안향에 의해 도입된 성리학은 백이정과 권부, 우탁 등에 의해 전래되었다.
당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고려의 성리학 발흥에 기여한 또 다른 인물들이 금산 지역이었던 진례현에서 나왔다. 바로 율정 윤택과 윤택의 손자 윤소종이다. 윤택의 묘지명에 따르면 윤택은 할아버지 윤해와 고모부 윤선좌에게 글을 배웠고, 읽는 것마다 곧 잘 외웠다고 한다. 윤택은 국자시에 합격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지냈는데, 연경에 있던 충숙왕을 알현한 뒤에 신임을 얻었다. 고모부였던 윤선좌와의 만남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 윤선좌는 윤관의 후손으로 한평생을 성리학의 깊이 있는 연구와 실천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오직 경사(經史)로 낙을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질문이 있으면 항상 경서에 근거하여 답을 하였다. 윤선좌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곡도 윤선좌의 학문적 재능과 명망을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윤택은 공민왕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남은 생을 금산에서 보냈다. 공민왕은 직접 윤택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호를 써서 내려주었다.
윤택의 학문은 손자 윤소종에게 이어졌다. 윤소종은 공민왕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과거 급제 당시 지공거는 이색이었다. 이색과 윤소종은 좌주와 문생이 되어 윤택과 이곡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졌다. 이색은 자신의 글에서 “내가 젊었을 때 윤택을 스승으로 섬겼고, 기거공은 나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었으며 윤소종이 나의 문생이 되었으니 여러 의리를 헤아려 볼때 사양할 수 없다”고 한 대목에서 윤소종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윤소종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개혁에는 이색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윤소종은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부폐한 조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정도전 및 조준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에 찬성했다. 이러한 개혁의 의지는 고향의 농촌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인다. 윤소종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금산으로 내려와 지방민의 생활상을 목격한 것이다. 윤소종이 남긴 시문을 보면 지방민의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성계의 신임을 얻고 있던 조준을 통해 현실 정치에 참여했는데,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했고,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 사회의 구현을 지향하였다.
이숭인이 윤소종에게 답한 시에 그러한 모습이 보여진다.
금산 고을 산중에 늙은 할미 있어서
몸이 병없는 채 백살을 넘겼다네
낳기는 남으로 전당을 취한 해 전
이야기는 동으로 일본을 칠 적까지
그 얼굴 옥같으니 과객이 다 놀라고
제 머리 흰 실 같음을 증손이 탄식하네
덕우 연간에 나서 홍무까지 나왔으니
태사는 마땅히 그의 시종을 알고 기록하오.
[여말선초 야은 길재의 성리학]
야은 길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평으로 경상북도 선산 출신이다. 부친은 지금주사를 지낸 길원진이고 모친은 판도판서에 추증된 김희적의 딸이다. 해평 길씨가 금산에 들어오게 된 것은 길재의 부친 길원진이 금산의 지방관이 되면서 부터였다. 11세에 처음으로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다. 상산사록 박분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읽고 성리학을 채득하게 되었다. 부친을 보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의 지론을 듣게 되었다.
공민왕대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에 합격하였고, 우왕대 과거에 급제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금산 부리에서 장사를 지냈고 3년 동안 부리에서 우거를 하였다. 이후 다시 벼슬을 하고 선산으로 돌아갔으나 간간히 부친의 묘소 옆에 와서 살았고, 결국 그의 후손들은 금산에서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길재는 성균관에서 재직하고 있을 때 태학의 생도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양반 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창왕 연간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구실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관직에 임명을 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니 아내도 그 뜻을 본받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은 그에게 관직을 내려주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고 고향 선산에서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김숙자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이후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에게 길재의 학통이 계승되었다. 길재는 1419년(세종 원년)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 야은 길재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는 금산 성곡서원, 선산 금오서원, 인동 오산서원, 금산 청풍사, 공주 동학사 삼은각 등이 있다.
[윤구생의 실천적 성리학]
야은 길재와 더불어 또 한 명의 성리학자를 들 수 있으니 바로 윤구생이다. 금산이 예로부터 유향(儒鄕)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금산 지역은 여말선초라는 국가의 전환기를 맞이할 때 많은 선비들이 입향을 하여 외로움을 실천하는 선비들의 본향으로 알려졌다.이 시기에 야은 길재, 율정 윤택, 의율재 박인, 전리판서 곽사, 문헌공 신덕재 등 여러 인물들이 금산에 입향을 허간 금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 중에서 남일면 초현리는 윤택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초현리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국학대사성을 지낸 윤해의 장남 윤수평이었다. 초현리에 입향한 이유는 처가와의 인연에 따른 것이었다.
초현리는 성리학의 수용에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윤수평의 아들 윤택, 윤구생 부자를 배출하였다. 이는 금산이 유림의 고장이라고 알려지게 된 중요 이유 중 하나였다. 기록에 따르면 찬성사 윤택은 충숙왕으로부터 공민왕의 부위를 부탁받은 고명대신이었다. 윤구생은 주자가례를 실천하여 조정에서 이미 그 이름이 있던 선진적인 실천적 성리학자였다. 이들 부자가 금산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판전농시사까지 올랐으나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산으로 돌아왔다. 초현리에서 주자가례를 실천하며 사당을 짓고 삼대를 제사지냈다. 부모와 조부모의 묘소 남쪽에 재실을 짓고 기일을 새겨서 후손들이 제삿날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공양왕 대에는 조정에서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를 내리고 효자비를 세워주었으며 국가에 내는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고려 말의 개혁론자로 활약한 윤소종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지금도 남일면 초현리에 가면 윤구생의 효자비를 볼 수 있다.
[충절인을 모신 금산의 서원과 사우]
선현을 추모하고 그 유덕(遺德)을 기리는 제사적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서원과 사우가 있다. 서원과 사우에 모셔진 인물을 보면 그 지역의 성격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금산 지역은 조선 시대에 전라도에 속하지만, 충청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거리상으로 가까웠고, 충청도의 학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 이래 김장생 문인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서원과 사우에 배향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금산 지역의 유풍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인 윤택과 길재 등에게서 비롯되어 이유태와 조헌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인 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 송준길, 김원행, 유계, 송명흠과 소론계의 윤선거, 윤증 등과 연계되는 양상을 보인다.
금성면 파초리에 있던 반계서원은 초려 이유태를 모신 서원이다. 이유태의 문집에 따르면 여러 형제들과 함께 파초리 인근의 유곡리에 문회당을 건립하여 수천권을 경서를 비치하고 향수재와 자제들을 강학하였다고 한다. 이유태가 죽은 뒤에 지역 유생들이 상소하여 건립을 요청하였고, 이유태를 독향(獨享)하였다. 영조 연간 서원 정리 사업으로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산천재서원은 윤선거, 윤증, 윤추를 모신 서원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윤선거와 윤계는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에서 은둔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성리학의 진리와 예론을 연구하며 산수를 즐겼다. 그곳에 작은 서재를 지었는데 바로 이름이 ‘산천재’였다. 유계가 쓴 기문에 따르면 산 밑의 깨끗한 물이 근원에서 시작하여 계곡, 시내,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과정을 어린이가 성장하여 성인(聖人)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비유하였다. 이로서 윤선거와 유계가 산천재를 설립한 목적인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윤선거는 산천재서원에서 유생 강론과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윤선거 사후 윤증이 산천재서원을 강학과 학문 탐구의 본거지로 삼았다. 윤증이 사망하자 후학들이 윤증의 초상화 위패를 봉안하였다.
성곡서원은 금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서원으로, 금산 지역의 대표적인 사액서원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낙천재 김신, 율정 윤택, 야은 길재와 더불어 기묘사화 중 한 인물인 김정,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조헌과 고경명이었다. 현종 연간에 지역 유생들이 상소하자 정부에서는 치제를 하였고, ‘성곡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내려주었다.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작성하였고, 학규(學規)는 초려 이유태가 지었다. 성곡서원에서는 원생 25인을 뽑아서 지방 교육에 힘을 썼다. 삼남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 유림들이 토지를 헌납하여 재정도 풍부하여 지방 교육을 하는데 힘을 보탰다.
제원면 용화리에 자리한 용강서원은 숙종 연간 세워진 서원이다. 송시열, 송준길, 유계를 제향하였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자 1910년경 지역 유림들이 헐린 재목을 일부 모아 용강서당을 짓고 유림의 회합과 자제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용강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던 때였다. 건립 당시 배향된 인물을 보면 모두 이 지역의 노론계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미호 김원행과 역천 송명흠이 용강서원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기도 하였다.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조부 김창집이 사사되면서 김원행의 집안이 제원면으로 유배가 되자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을 하게 되었다. 송명흠 또한 노소가 당쟁이 치열한 가운데 부친과 함께 옥천에 살면서 용강서원에 출입하여 강론을 하였다.
종용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연곤평에서 순국한 중봉 조헌과 승장 영규대사, 와은평에서 순국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과 횡당촌 전투에서 순국한 변응정 및 그의 막료, 사졸, 무명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금산 전투 이후 이들의 충혼을 달래기 위하여 칠백의총이 조성되었고, 이들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바로 종용사였다. 처음에는 사우로 건립되었고 현종 연간 사액이 되었다. 종용사는 금산 지역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제향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역 유림들에 의해서 복원되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대대적으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곡사는 고려의 문신이자 효자로 알려진 문충공 한교와 현종 연간 대흥현감을 지낸 이유택을 모신 향현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곡에 정려를 건립하고 효자비를 세웠다고 하며, 이유택은 대흥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하고, 3년간 시묘를 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초려 이유태가 형인 이유택의 형제들과 함께 유곡리에서 수천권의 경서를 비치하고 자제들을 강학하였다고 한다. 복수면 곡남리에는 조헌사당이 있다. 조헌사당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중봉 조헌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다. 부리면에는 야은 길재의 진영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청풍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