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55
한자 朝鮮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범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금산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금산군진산군이 있었으며 객사, 관아, 향사당 등을 갖추고 있었다. 교통 수단으로 제원역을 비롯한 5개 역이 금산군에 있었으며, 공무수행자들을 위한 여관과 같은 기능을 하던 역이 금산군에 6개, 진산군에 3개가 있었다. 금산 지역의 면리 편제와 인구 등 내부의 구조는 18세기 말을 기준으로 금산군 14개면 83개리, 진산군 7개면 72개리로 편제되어 있었고, 8천여 호, 2만 8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금산 지역의 조세는 전라도 함열현을 거쳐 한양의 광흥창으로 수납되었다.

[연혁과 관아시설]

금산 지역에는 금산군진산군 두 행정구역이 있었다. 고려 시대 금주군사가 금산군이 되었고, 진례현의 임내에 불과했던 지역이 진산군으로 계승되었다. 두 군현 모두 전라도에 속하여 전주부의 관할에 있었다. 금산군진산군은 조선 시대 내내 유지되었고, 1914년에 병합되었다. 금산군은 동쪽으로 옥천군, 남쪽으로 용담현, 북서쪽으로 진산군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산군의 지형과 산수를 두고 이규보는 “산이 극히 높아서 들어갈수록 점점 그윽하고 깊다”라고 표현하였고, 이곡은 “사방은 막히고 길은 깊고 험하다”라고 표현하였다. 산을 두르고 강을 띠고 있어 전라도에서 가장 궁벽한 땅이니, 실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이라고 보았다. 진산군은 백제 시대 진동현이었다. 고려 시대 다른 지역의 속현으로 남아 있다가 만인산태조의 태실이 모셔지면서 진주군이 되었고, 태종대 개칭되어 진산군이 되었다.

금산 지역은 금산군진산군 두 군현으로 구성되어 각각 고을마다 관아시설이 존재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금산군에 읍 토성이 있어서 둘레가 426보였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둘레가 1,045자, 높이 8자였다고 하며 성 안에 우물이 4곳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중엽 작성된 『여지도서』에 보면 금산군에 객관, 아사, 향사당, 훈련청, 군기고가 있다고 하였으며, 진산군에는 객사, 아사, 향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에는 지방통치의 수단으로 군현 단위마다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영혼없는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여단, 산천, 성황, 풍운, 뇌우 등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황단 등이 있었다. 금산군진산군에도 각각 사직단은 군 서쪽, 성황당은 군 남쪽, 여단은 군 북쪽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통과 통신]

조선 시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는 역과 원이 있었다. 역은 중앙정부와 지방 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한 교통 조직이었고, 원은 출장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주요 도로와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한 국역 숙박시설이었다. 금산 지역의 역참으로는 제원역(濟原驛), 소천역(所川驛), 달계역(達溪驛), 단령역(丹嶺驛), 옥포역(玉包驛)이 있었다. 5개 역은 모두 금산군의 행정구역 안에 존재하고 있었고, 진산군의 영역 안에는 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공무를 수행하는 여행자의 숙식을 해결하고자 읍치에는 객사, 외방에는 원(院)이 갖추어져 있었다. 객사는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각 군현의 관(館)이었고, 원은 객사 이외의 주요 도로 중간에 설치된 일종의 여관이었다. 국가에서는 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별도의 토지를 지급하였고, 세종 연간에는 이를 정비하여 부근 거주민들을 원의 주인으로 삼아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공무여행자에게는 국가로부터 일종의 여행비인 초료(草料)가 지급되었다. 금산군에 설치된 원으로는 남제원, 기평원, 북정원, 금남원, 동원, 금곡원이 있었고, 진산군에는 삼식원, 요광원, 신창원 등 3개의 원이 존재하였다.

[면리편제와 인구]

조선 초기에는 면에 권농관, 리에 이정을 두어 촌락을 교화하고 통제하며 면리 단위의 수취체제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인 형태의 면리제가 시행되었다. 1750년대 작성된 『해동지도』에는 금산군 12개면, 진산군 5개면이고, 1760년에 작성된 『여지도서』에는 금산군 13개면, 진산군 7개면이고,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금산군 14개면 83개리, 진산군 7개면 72개리가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금산군에는 군일면, 군이면, 남일면, 남상면, 남하면, 서일면, 서이면, 부서면, 부동면, 부남면, 군북면, 동일면, 부북면, 역리면이 있었으며 원호(元戶)는 6,092호, 전체 인구는 20,795명이었다. 진산군에는 군내면, 서면, 북면, 동일면, 동이면, 남일면, 남이면이 있었고 원호는 1,961호, 전체 인구는 7,940명이었다. 인구수로 보면 금산군진산군에 비하여 3배의 규모였다.

[조세와 진휼]

금산 지역에 부과된 조세는 18세기 중반 편찬된 『여지도서』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금산군 토산조’의 특징으로는 금산군에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산에서 생산되는 임산물이 많다는 점이었다. 금산군의 전세는 쌀 377석, 콩 402석의 규모였으며 삼수량미로 241석을 거두었다. 이렇게 수취한 전세는 2월에 거두어들여 3월에 전라도 함열현 성당창에 납부하였고 배에 실려 안흥, 강화를 거쳐 서울의 광흥창에 수납되었다. 금산군의 전세 운송은 대략 15일 정도 소요되었다.

이외에도 금산군 지역의 군역(軍役)도 다수 존재하였다. 훈련도감 포군 보인, 어영청 보인, 병조의 기병과 보병, 군기시의 별파진, 중앙 각 아문과 군영의 보인 등이 다수였다. 이외에도 충청감영 소속의 군병과, 병영 소속의 군병, 속오군으로서 여산 후영장 소속의 군병도 있었다. 진산군의 경우 진공조를 보면 진상품 목록이 확인된다. 토산조에는 창출(蒼朮)과 도라지, 더덕, 당귀 등이 보인다. 진공조에는 날 꿩고기, 말린 꿩고기, 곶감, 날 노루고기, 보리, 밀, 햅쌀, 부채, 솜, 줄바, 짚자리, 상자 등이 있었다. 진산군은 경작지가 적어서 금산군에 비하여 전세 상납액이 적었다. 쌀 84석, 콩 148석에 불과하였다. 진산군에 부과된 군역은 금산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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