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29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

[고대]

금산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10여 곳이 넘게 남아 있으며 신석기 유적은 유물 몇 점만 수습되었을 뿐 흔적은 찾기 힘들다. 다만 금산 지역이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볼 뿐이다. 현재 대부분의 선사 시대 유적은 청동기 유적이며, 대표적으로는 수당리 유적, 아인리 유적, 장대리 유적을 들 수 있다. 또한 다수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서 일찍부터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초기 국가 시대의 금산 지역은 마한의 정치 체제에 속하여, 고대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에 크고 작은 소국들이 존재하였다. 금산을 포함한 마한 권역에는 모두 54개의 소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산 지역으로 비정되는 마한 소국은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그 중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여산 지방으로 비정된 여래비리국과 전주에 비정되는 불사분야국이 인접하고 있어서 금산 지역은 이들 소국에 편제되거나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추정해 볼 뿐이다.

백제는 마한을 통합하여 4세기 후반경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금산 지역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의 강역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금산에는 완산주에 속했던 진잉을군과 황산군의 영현이었던 진동현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잉을군금산읍에, 진동현진산면에 속하며 진잉을군의 영현이었던 두시이현은 이후 부리현으로 개칭되어 지금의 부리면이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하고, 무주군 부남면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

백제가 멸망된 이후 금산 지역은 일시적으로 덕안도독부에 영속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치른 후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지역에 새로운 주를 설치하였다. 금산은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접경 지대였지만,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배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 유적으로 사찰을 비롯한 유물 산포지가 금산 지역에 다수 존재하였는데, 지역의 안무를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삼국 시대에 들어와 금산 지역은 일시적으로 후백제와 고려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는 왕건이 천안에서 남하하는 과정에서 이를 막기 위해 남이면에 현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금산 지역은 진례현 일대의 지역이었다. 진례현은 5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라도 전주목에 속해 있었다. 진례현의 5개 속현은 부리현, 청거현, 주계현, 무풍현, 진동현이었다. 이 중에서 부리현, 청거현, 주계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진례군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예전의 백제 지역이었다. 백제 시대 진잉을군진례군으로 고치고, 두시이현이성현으로 개명하여 진례군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진례현은 고려 말 원 간섭기 기간에 지금주사로 승격되었다. 충렬왕 시기 이 지역 인물인 김신의 공훈으로 7품관인 현령에서 5품관인 지사가 파견되는 지방이 된 것이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금산 지역에는 두 개의 군현이 있었다. 하나는 고려 시대 지금주사금산군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진례현의 속현에 불과했던 지역이 진산군이 된 것이었다. 두 지역은 전라도에 속하여 전주부의 관할에 있었다. 금산군진산군은 조선 시대 별다른 변동 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진산군이 독립된 군현으로 설치된 것은 태실의 영향이 컸다. 1393년(태조 2) 태실을 관리하기 위해 길지를 찾다가 전라도 진동현에서 길지를 찾아 태실을 이곳에 안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진동현은 진주로 승격조치 되었다. 이는 진산군이 통폐합되지 않고 존속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금산 지역은 일찍부터 성리학이 도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야은 길재윤구생을 들 수 있다. 금산 지역의 두 군현 중에서 금산군진산군에 비하여 호구와 토지결수가 3배 정도 컸다. 『호구총수』를 기준으로 하면 금산군은 6,092호에 20,795명이었으나 진산군은 1,961호에 7.940명에 불과하였다. 금산 지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는 임진왜란 기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금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위하여 모셔진 칠백의총은 금산 지역의 가장 중요한 추모의 장소가 되었다.

[근현대]

조선 후기 금산군진산군은 전라도에 편제되어 있었으나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충청도 공주부로 이속되었다. 그러나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에 편입되었고, 1963년에는 충청남도로 이전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1896년 전라북도에 편제될 당시 군의 등급은 4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금산군은 3등군으로, 진산군은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905년 통감부에 의해 지방제도조사소가 구성되고 지방제도 개정에 대한 제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진산군은 금산군에 통합시킨다는 논의가 많았고 결국 1914년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시행된 군면통폐합 당시 진산군금산군은 금산군으로 단일화되었다. 면리도 정리되어 금산과 진산의 19개 면은 10개면으로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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