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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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개설]
금산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13곳이 넘으며 금산의 자연 환경이 구석기인들이 살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유적은 현재 유물 1점이 수습되었을 뿐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다만 금강 상류 유역에 속하기 때문에 다수의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선사 시대 유적은 청동기 유적으로 현재 40여 곳이 넘게 확인되었다. 대표적으로 수당리유적, 아인리유적, 장대리유적을 들 수 있다.
[구석기 시대]
금산 지역에는 13개가 넘는 구석기시대 흔적이 확인된다. 제원면 천내리에서는 뗀석기 7점이 수습되었고, 추부면 요광리, 복수면의 백암리와 다복리, 제원면의 용화리와 저곡리, 부리면 수통리, 진산면 삼가리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구석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추부면 마전리에서는 구석기시대층으로 알려진 토양층이 확인되었다. 아직 제대로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기는 조금 어렵다. 다만 13개소에 이르는 구석기시대 흔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당시 금산 지역이 구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금산의 자연환경이 구석기인들이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던 셈이다.
[신석기 시대]
금산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의 흔적은 다수 확인되지만, 신석기 시대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제원면 천내리에서 수습된 빗살무늬토기 1편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서 구체적인 금산 지역 신석기 시대의 실상과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금산 지역이 금강 상류 유역에 속하기 때문에 다수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청동기 시대]
금산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 다수의 인간 삶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 유적이 40여개가 넘게 남아 있으며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도 4곳이 넘는다. 아직 지표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유적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유물 산포지와 고인돌이 다수를 차지한다. 유물 산포지는 20여 개소가 넘으며 주로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주거지일 가능성이 높다. 고인돌은 11개소가 넘게 확인되며 마제석검 출토지는 4곳에 이른다. 정식 발굴조사가 진행된 유적으로는 아인리유적, 수당리유적, 장대리유적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분묘가 확인되어 주거지와 함께 광범위한 분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금산 지역 청동기 시대 유적은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할 뿐만 아니라 유적의 성격도 주거지와 분묘 등이 병행하여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시대로의 이행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9세기 경으로 내려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기원전 700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견해이며, 그 하한은 대략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청동기 시대는 당시 사용된 동검의 형태를 기준으로 다시 전기와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 경계는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하는 기원전 300년 경이다. 금산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40여 개소에 이르고 있지만, 이들 유적 가운데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유적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문화상을 추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조사된 주거지의 내용을 통해 볼때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청동기 시대 특징으로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농경은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취락을 형성하였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눈 앞에 둔 구릉상에 분포하고 있다. 금산 지역도 금강을 끼고 발달된 지천 주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농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생활의 흔적은 곡물이나 반월형석도, 삼각형석도 같은 농경기구를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유적은 파초리와 수당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재배 작물은 조, 기장, 수수, 콩과 같은 밭곡식이 대부분이었으나 부분적으로 벼농사도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수렵과 어로는 여전히 행해졌으며, 수당리 주거지에서 출토된 다수의 토제어망추는 당시의 어로 행위를 잘 보여준다. 금산 지역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경우에는 수혈주거가 대부분으로 일반적인 청동기 유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산 지역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주목되는 유적은 수당리유적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개설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이 자리한 구릉은 높은 편이지만 평지와의 비고차는 비교적 나지막한 구릉이다. 유적은 봉황천의 지류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2002년 조사에서는 주거지 4기와 분묘 유적 2기, 2004년 조사에서는 주거지 6기, 수혈유구 1기, 석관묘 1기가 확인되었다. 방형 주거지는 청동기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가락동 유형이고, 원형 주거지는 내부 바닥면에 타원형 구덩이가 시설된 송국리형 주거지로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한다. 한편 아인리유적은 토지구획 정리사업 과정에서 조사된 유적으로 주거지 2기와 분묘 5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아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없지만, 방형 계통으로 추정된다. 금산 장대리 고분군 조사과정에서 청동기 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다.
금산 지역의 청동기 문화를 이해하는데 특히 주목할 내용은 고인돌이다. 현재까지 고인돌은 10여 곳이 확인되었다. 다만 발굴조사를 통해 그 구조와 성격 등이 밝혀지지 않아 지석묘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석묘의 존재가 농경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금산 지역이 금강을 중심으로 소하천이 발달해 있어 농경 생활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