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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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谷祠 |
이칭/별칭 | 유곡서원(柳谷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서원모정길 54-8[하류리 31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기훈 |
건립 시기/일시 | 16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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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766년 - 유곡사 중건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8월 16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유곡사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유곡사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서원모정길 54-8[하류리 315-2]![]() |
성격 | 사당 |
양식 | 맞배지붕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하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유곡사(柳谷祠)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효자인 문충공(文忠公) 한교(韓皦)와 조선 현종 대에 대흥현감을 지낸 유곡(柳谷) 이유택(李惟澤)[1600~1668]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유곡서원(柳谷書院)이라고도 한다. 한교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회묵재(晦黙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금주 영각리에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에 급제하였고, 보문각직제학 등을 지냈다. 임금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하여 금계군에 봉해졌다. 한교의 효성은 후대까지 알려져 1550년(명종 5)에 유곡에 정려를 세웠으며, 1554년(명종 9)에 시호 문충을 받았다. 이유택의 호(號)는 유곡이며, 대흥현감을 지냈다. 69세 노인이 된 뒤에 어머니가 병들어 죽자 삼년상을 치르다가 상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유택의 아버지 이서(李曙)와 큰아버지 이시(李時)는 금계 한씨(錦溪 韓氏)의 사위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집안 인물이 함께 배향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유곡사는 금산군 금성면 하류리 315-2번지에 있다. 하류2리경로당과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당 북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있는데, 유곡 이유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 사시봉 능선을 넘어가면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로 넘어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사천(猉斯川)이 흐르고 있다.
[변천]
1664년(현종 5)에 유곡사를 현재의 위치에 창건하여 고려 후기의 문신 한교를 제사하였다. 1668년(현종 9) 유곡 이유택이 사망한 이후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숙종의 지시로 정려를 세웠다. 1702년(숙종 28)에 ‘향현사(鄕賢祠)’로 사액을 받았고 복호미(復戶米) 2결을 받았다. 이후 금산군수 서각수가 지은 「사우중건상량문(祠宇重建上樑文)」에 ‘1766년(영조 42) 여러 사림들의 뜻을 모아 서각수가 유곡사를 중건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유곡사는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에 한교와 이유택의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1988년에는 유곡서원을 복원하였다.
[형태]
유곡사는 크게 2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유곡사는 입구에 ‘유곡사’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전면부는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의 사당에 주로 사용되는 형태인 맞배지붕으로 복원하였다. 바깥쪽에 있는 유곡서원은 입구에 ‘유곡서원’ 현판이 세워 있으며, 시멘트로 만들어진 일반 가옥과 같은 형태로 복원하였다.
[현황]
유곡사는 2011년 8월 16일에 금산군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매년 지방 유림에서 음력 3월 21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