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13 |
---|---|
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3·1 Movement in Geumsan |
이칭/별칭 | 삼일만세운동,기미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헌주 |
[정의]
1919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발생한 독립만세 시위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충청남도 금산군에서는 3월 하순경부터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3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장날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3월 25일, 26일, 28일에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산에서도 3월 26일에 방축리 장날에 시위가 일어났고, 3월 31일에는 복수면 곡남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렇듯 금산군 일대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이 행정을 겸임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고 태형의 실시와 민족차별의 일상화 등 조선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행하였다.
이후 1918년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 제기된 것인데, 이것이 당시 식민지 하에 놓여있던 모든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인식되었다.
한국인들 역시 이 원칙에 의거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결국 민족자결주의 연설에 고무된 만주와 러시아를 비롯한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1918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일본의 독살로 사망했다는 독살설까지 대두하면서 전국적인 저항의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경과]
충청남도 금산군의 3·1운동은 3월 하순경부터 일어났다. 그 중에도 금산면의 청년 김용술·임승환 등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금산군에서도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3월 23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같이하였다.
3월 23일 오전 구호열과 변희조 등은 금산읍 장날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격문을 배포하였고, 오후 2시경 김용술·임승환 등은 20여 명의 청년과 함께 우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주위의 군중이 호응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헌병분대의 긴급 출동으로 주동자들이 체포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하지만 밤 10시 경에 다시 3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헌병의 출동으로 해산하였다.
3월 25일에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동쪽에 있는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제원리의 박영규는 3월 25일 저녁에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태극기를 들고 사람들을 규합하였고, 박영규와 주민들은 26일에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에서는 3월 28일에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밤 10시 경에는 서대산(西臺山)에 봉화를 올렸고, 금산군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한편 진산면에서도 3월 26일 방축리 장날에 하홍학(河弘學) 등 50여 명의 청년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3월 31일에 복수면 곡남리에서도 김영호와 정재철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재철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도로공사에 나왔던 수영리 주민 약 2백 명이 모두 동참하였다. 아울러 곡남리의 유영준 등을 비롯한 군중들은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도로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지만, 김영호·오연구 등은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의 대열을 지휘하였고 만세시위는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후 헌병들의 진압이 계속되었지만 밤 11시 경까지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가두행진은 계속되었다.
[결과]
진산 헌병주재소 헌병의 무력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었고, 김영호·정재철 등 주동 인물 7명이 체포당하였다. 그렇지만 만세시위는 야간 산상시위 등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의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하홍학(河洪學)은 헌병에게 살해당하였으며, 한철종·김현재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은 반외세적 항일 정신을 계승한 인사들과 일제의 경제적 침탈 과정에 고통을 받던 지역민들이 주도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 싸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또한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20·30대의 젊은 청년층 중심으로 추진된 독립운동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