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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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영어공식명칭 | The Modern History of the Geumsan-gu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개항 이후 해방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역사.
[개설]
개항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각 지방의 양반과 유생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금산 지역도 사회와 경제면에서 여러 변화를 겪었으며, 해방을 위한 민족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개항기 금산 지역의 항일 투쟁]
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 투쟁을 보면 충청남도 공주 출신 의병장 송암 노원섭이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활동을 하였다. 1907년 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봉기한 문태서는 무주군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 투쟁을 벌였다. 문태서 부대에 속했던 금산 지역 출신으로는 강이봉과 김백원 등이 있었다. 강이봉은 금산군 동일면 구억리 출신으로 의병 군수물품을 모금하였다. 김백원은 금산군 부북면 제원리[현 제원면 제원리] 출신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문태서 부대는 아니지만 방치경은 금산군 군내면 제동리 출신으로 영동군에서 철도 정거장을 파괴하는 격문을 배포하고 장정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금산 출신 인물의 의열 투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을사오적 처단 거사였다. 이 거사에 가담한 인사 들 중에는 권중현, 황문숙, 황성주, 이경진, 이종학, 최상오 등 금산과 진산 출신이 6명에 이르렀다. 또한 일본의 강제 병합 당시 금산군수였던 홍범식은 통곡하면서 자결하였다.
[일제 강점기 금산 지역 사회와 경제]
금산의 인구 변화를 보면 1925년 70,173명에서 1930년 72,962명으로 2,789명이 증가하였으며 이는 전라도 전체 인구의 4,8%에 해당한다. 또한 금산 지역의 동족 촌락의 수는 49개로 평야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동족 촌락의 수는 적은 편이었다. 금산 지역에 동족 촌락이 적은 것은 지리적 요인인 산지 지형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산의 산업 구조를 보면, 행정 중심지인 금산면을 중심으로 농업, 공업, 상업 등 여러 부문의 직업별 인구가 확인되었는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금산도 농업이 중심이었다. 무엇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88.3%를 차지하여 사실상 절대적이었다. 상업과 공업 인구는 각각 4%, 2%에 불과하였다.
일제강점기 금산 지역 내에서는 다수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보통학교 15개의 초등교육기관이 존재하였고, 1945년 3월에 가서야 중등과정의 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 금산의 주요 면에 1개씩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교육 발전을 위한 중등교육 기관의 부재는 여전하였다. 이는 오늘날 금산의 지역 발전이 저해되는 교육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은 결국 금산을 떠나 공주, 대전, 전주 등으로 진학을 하였다. 금산의 인재 육성 뿐만 아니라 교육의 질도 일제강점기 내내 좋아지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산 지역의 3·1운동]
금산군의 3·1운동은 3월 하순 경부터 진행되었다. 금산면의 김용술과 임승환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3·1운동에 호응하여 금산군에서도 일제히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에 합의하고 3월 23일 금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같이하였다. 거사 전날 격문을 작성하고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하였다.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주위의 군중이 호응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금산면 헌병분대의 긴급 출동으로 주동 인물들은 체포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일시 해산되었다.
하루 건너 3월 25일에는 읍내 동쪽에 위치한 제원면 제원리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제원리의 박영규는 일찌기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중 3월 23일에 있던 읍내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계획하였다. 태극기를 그리고 ‘한국독립만만세’라고 쓴 깃발을 매고 나와 동네 종을 치고 또한 큰 북을 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다음 날인 3월 26일 오후에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헌병에 의해 해산되고 박영규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진산에서는 3월 26일 방축리 장날 하홍학이 주동이 되어 독립 만세를 불렀다. 진산에 거주하는 청년이 의논 끝에 당일 말똥재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고 방축리 장터로 가서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진산군민의 기개를 보여주자고 결의하였다. 결국 뒤늦게 달려온 일본 순사와 헌병들에 의해 탄압되었다. 3월 31일에는 복수면 곡남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김영호, 정재철, 오연구 등은 곡남리 앞 길에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던 중 각 지방의 만세 운동 상황을 듣고 합류하여 시작되었다. 도로 공사를 감독하러 온 헌병이 이를 제지하였으나 만세 운동의 형세는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