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710 |
---|---|
한자 | 吳然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기성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8월 12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오연구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 만세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0일 - 오연구 태 90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6월 1일![]()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출생지 |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 404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오연구(吳然九)[1876~1953]는 1876년 8월 12일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1일, 오연구는 수영리 주민들과 복수면 곡남리 도로 수선 부역에 동원되었다. 휴식 시간에 정재철(鄭在轍)이 대전에서 일어난 3·1운동 상황을 이야기하고, 금산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하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오연구를 비롯한 김영호(金永浩), 유영준(兪英濬) 등 주민 200여 명이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곧바로 헌병이 출동하여 만세 운동을 제지하였지만, 오연구는 김영호와 함께 더욱 크게 만세를 부르며 저항하였다. 이 때문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전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90을 선고받았다. 1953년 6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오연구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치되었다.
[상훈과 추모]
오연구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