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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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Movement- |
이칭/별칭 | 갑오농민전쟁,동학운동,동학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소영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1894년 3월부터 1895년 1월까지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와 유적.
[개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3월 8일 동학농민군들이 금산 제원면에서 봉기하여 1895년 1월 24일 대둔산 항쟁지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토벌될 때까지 전개되었던 반봉건·항일 농민 운동이었다. 1894년 당시에는 현재 금산 지역이 금산군과 진산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후 1914년 금산군으로 통합되어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에 속했으며, 1960년에 다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금산의 동학농민운동은 과거 금산과 진산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아우르는 것이다. 금산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 세력과 최시형의 동학교단 세력이 함께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또 과거 별개의 행정 구역이었던 진산은 동학농민군이 치열하게 항쟁을 전개하여 득세했던 반면 금산에서는 보수 세력이 조직한 민보군이 강해 농민군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갈등하였다. 즉 진산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금산 지역의 양반 및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반농민군 세력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1894년 3월 8일 금산 동학농민군의 제원기포는 무장 기포보다 더 앞서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의 항쟁이 대부분 1894년 12월에 이르러 거의 종결되었던 반면 금산 농민군은 대둔산 근거지에서 1895년 1월 말까지 항쟁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에서 금산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큰 의미를 가진다.
금산 지역 동학의 전래
1861년 최제우가 경주에서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시, 포교하기 시작하였고, 1862년 12월 경에는 경주를 떠나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금산 지역에도 동학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와 관련된 정확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887년 황간에 거주하던 조재벽이 동학에 입문하였고, 이후 옥천, 영동, 청산 지역을 비롯하여 금산, 진산, 고산, 용담 등으로 동학이 확산되었다. 금산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 세력과 최시형의 동학 교단 세력이 함께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금산 지역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들 중 한 명인 조재벽은 1887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금산 지역을 비롯하여 황간, 옥천, 영동, 청산 등 충청 일대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다. 1892년 11월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서장옥, 전봉준, 김개남 등과 교류하였고,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전개한 교조 신원 운동, 3월 보은 교조 신원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보은 교조신원운동 시기 동학교단은 새로운 체제로서 대접과 포를 조직하였다. 금산 지역의 대접주로는 서장옥이 임명되어 관할 책임을 지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재벽이 금산 동학의 중심 지도자로 활동했다. 조재벽 외에도 금산 지역의 접주급 주요 인물로는 진기서, 최학연, 정지홍, 최고금, 이광의, 이광우, 이시열, 조한봉, 김재순, 진수환, 강태종, 전판동, 김석순, 권옥, 김순익, 심헌식, 김정만, 이봉석, 백학선, 이선달, 진기서, 정유술, 김기조, 조동현, 이야면, 조재벽, 최사문, 최공우, 박종만, 박홍근, 최사문, 고판광, 김태경, 송인업, 김공진, 김치삼, 장문화, 정옥남, 박중집, 이홍기, 김치선, 양양옥, 김세마, 정윤서, 서도필, 박만호, 이만실, 조윤삼, 박치팔, 김윤일, 조경중, 박능철 등이 있었다.
삼정 문란과 금산 동학농민군의 기포
교조신원운동 단계를 넘어 금산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동학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기포]은 1894년 3월 8일 제원역에서였다. 제원 기포는 3월 20일 고창에서 일어난 무장 기포보다도 앞선 농민 봉기였다. 제원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관청으로 몰려가 점령한 후 금산군수에게 10개 조의 폐정 개혁안을 담은 소장을 제출했다.
제원 기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다른 지역의 농민 항쟁 발생 원인과 마찬가지로 삼정의 폐해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금산군수였던 민영숙은 호장 김원택의 가혹한 수탈, 즉 전세(田稅), 대동(大同), 군전, 호렴(戶斂)[가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여 거둔 세금] 등 삼정의 폐해가 농민 봉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농민군은 3월 10일 금산관아에 전세, 대동, 군전, 호렴 등과 관련된 서류를 가져오라는 서찰을 보냈고,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다시 집결하였다. 또 농민군은 호장 김원택 및 보부상 반수 김치홍의 집을 파괴하고 보부상 접장 임한석 부부를 구타했다.
3월 13일, 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여 일단 해산하였지만 이후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군과 지역 보수 세력의 반목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농민군은 제원역에 재집결하여 금산관아를 점령하고 스스로 폐정 개혁을 실행하는 한편 용담현으로 진출하였다.
또 무장에서 농민군이 기포하자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4월 1일 방축에서 기포하였다. 방축기포 직후 앞서 농민군에게 공격당했던 보부상 김치홍과 임한석은 인근 지역의 보부상을 소집하고 읍민 천 여명과 함께 진산의 방축점으로 향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충돌로 인해 동학농민군 114명이 희생되었다. 반농민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산 지역은 여전히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1894년 10월 무렵까지 금산 지역에서 두 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은 지속되었다.
전주성 점령과 집강소 설치
1894년 4월, 금산 농민군은 부안으로 진출하여 다른 지역 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형성, 황토현 전투에 참여하였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점렴한 후 장성 황룡촌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농민군 연합부대는 정읍, 태안, 금구, 원평을 거쳐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5월 7일에는 정부 측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였다. 화약이 체결됨에 따라 6월부터 9월 초까지 전라도 53개 군현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금산 농민군들도 귀향하여 7월, 금산과 용담에 각각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진산군에서는 접주 진기서가 농민군들을 이끌고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고, 금산군에서는 용담군의 김기조가 집강으로 임명되었고 다음으로 조동현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금산은 앞서 언급한 대로 반농민군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으므로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이 일시적으로 가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민보군이 조직되면서 금산 지역의 치안을 장악하였다. 민보군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금산군 향리였던 정지환이었다. 정지환은 유생 고제학, 박승호, 전 첨사 박항래 등과 의논하여 전 참판이자 금산군수였던 정숙조를 맹주로 추대하여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민보군은 수성소를 설치하여 동학농민군과 대치하였다.
1894년 9월 13일 삼례에서, 18일에는 청산에서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하자 금산 지역 동학농민군도 2차 봉기를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군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금산 지역 보수세력도 9월 28일과 29일에 정두섭을 소모관, 정지환을 군관으로 임명하여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10월 15일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이 논산에서 합류한 후 공주를 공격하자 금산 동학농민군도 진산에서 기포하였다. 10월 22일에는 부수암에서 금산 농민군과 민보군이 전투를 개시하였다. 민보군의 주력이었던 정지환, 정두섭, 한홍규 등이 금산과 진산의 경계인 송원치[소라니재]를 방어하였으나 농민군이 승리하였고, 민보군 측의 사상자가 백여 명 발생하였다. 같은 날 금산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금성산, 삽치, 민치 등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22일부터 24일까지 이틀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과정에서 민보군 맹주 정숙조, 정두섭, 정지환, 한홍규 등이 사망하였다. 금성산 전투에서도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관청, 향교, 보수세력의 집을 소각하고 금산 일대를 장악하였다.
10월 24일 경에는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금산에 도착하여 금산 동학농민군을 비롯한 고산, 영동, 옥천, 무주, 연산, 공주, 강경 등지의 농민군과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농민군 연합부대는 11월 8일 용담현을 공격, 점령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금산 점령 후 11월 9일까지 머물며 각종 문서와 장부들을 없애고 향교, 관청 등을 파괴하였다. 이후 금산을 떠나 회덕, 유성을 거쳐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20여 명이 전사하고 퇴각하였다.
대둔산 항쟁과 동학농민군의 최후
김개남 부대가 금산을 떠난 직후인 11월 10일,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금산에 진입하고 민보군이 활동을 재개하였다. 농민군은 관군,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을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관군과 민보군은 11월 14일, 진산 조림장터에서 농민군과 싸워 이기고 금산 지역을 장악하였다. 또 공주 우금치에서도 농민군 연합부대가 패배하자 금산 농민군은 일본군과 민보군의 추격을 피해 대둔산으로 피신해 항전을 지속하였다. 대둔산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과 충청남도 논산군 벌곡면, 금산군 진산면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최고봉이 878미터에 이른다. 농민군은 대둔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항전을 이어갔다. 농민군을 추격해 온 관군과 민보군이 농민군을 토벌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지형이 험난해 접근이 쉽지 않아 번번이 실패하였다. 대둔산에서 최후 항전을 이끌었던 사람은 진산 접주였던 최공우였고 대부분의 항전 농민군도 진산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5년 1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과 관군은 대둔산 농민군을 토벌하는 작전을 펼쳤다. 일본군 특무조장 무내진태랑(武內眞態郞)이 이끄는 일본군 3개 분대와 별군관 윤지영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 30명은 1월 23일 대둔산에 도착하여 농민군 토벌을 시작하였다. 1월 24일 접전 끝에 농민군 25명이 사망했고, 항전지는 완전히 함락되었으며, 일본군 측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둔산에서 저항했던 농민군 명단은 도금찰 최학연, 도집강 장지홍, 도집강 최고금, 도집행 이광의, 도집행 이광우, 대정 이시탈, 접사 조한봉, 접주 김재순, 접주 진수환, 교수 강태종, 봉도 전판동 등이었다.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이 모두 진압되고 대부분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된 상황에서도 금산 농민군은 대둔산에서 항쟁을 지속했으나 결국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결과와 의의]
금산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무장기포보다 앞선 1894년 3월 8일 금산 제원면에서 처음 봉기한 이래 1895년 1월 24일 대둔산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였다. 금산 동학농민운동은 봉건 세력의 수탈과 외세의 침입에 맞선 민중 항쟁으로 전개되었으나 일본의 침략적 개입과 조선 봉건 지배층의 저지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저항 의식은 이후 의병 투쟁과 일제 식민지 시기 3·1운동을 비롯한 항일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계승되었다.
금산 동학농민군이 활동했던 주요 항쟁지로는 금산 제원 동학농민군 기포지[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200-8], 금산 소라니재 김개남군 전투지[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산22-1 일대], 금산 관아터 동학농민군 점령지[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인삼로 69], 대둔산 최후 항쟁지[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충청남도 논산군 벌곡면, 금산군 진산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