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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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1894년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발생한 동학농민군의 봉기.
[개설]
금산군에서는 1894년 3월 12일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이 제원역에 모여 농기구를 들고 금산읍으로 몰려갔다. 관청 내 문서와 물건에 불을 지르고 금산군 향리를 처벌하고 가옥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금산군수를 찾아가 폐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배경]
1860년대에 시작된 동학의 교세는 1880년대에 들어 체계화 과정을 거쳤다. 포교 지역도 확산되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에 이르렀다. 동학은 종교로서 병을 고치거나 기아를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들어가는 백성들도 많았으나,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학에 입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동학 교도가 점차 증가하자 정부에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탄압을 시작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들은 1892년부터 공주, 삼례, 서울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요구하고 여기에 더하여 포교의 자유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1893년부터는 여기에 더하여 외세배척운동이 시작되었다. ‘척왜양’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면적인 정치 문제를 제기한 것인데,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일본인과 서양인을 물리치자고 하였다. 결국 고부 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경과]
당시 금산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서장옥이었다. 서장옥은 최시형이 이끄는 교단 조직과는 다른 노선을 추구하였는데, 전라도의 혁명적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적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다. 서장옥의 동학농민군은 금산 봉기 직후 진산군 방축점에 동도소(東道所)를 설치하였고, 부대 중 일부는 전라도 부안으로 이동하여 전봉준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진산군 출신들이 방축점에 주둔한 농민군의 주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진산군에 주둔하자 금산군의 양반, 보부상, 향리들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들을 공격하여 1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남겼다. 잔존한 진산 출신 동학농민군은 이후 계속 진산을 장악하였다.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자 진산군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진산군 접주 진기서가 진산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다. 금산군의 경우에는 반동학농민군 세력이 강함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활동은 1개월을 넘기지 못하였다. 양반 중심의 민보군이 결성되어 금산의 치안을 장악하였다. 결국 금산군에서는 민보군이, 진산군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장악하여 대치하는 상황이 1894년 10월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한 재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금산 지역에서는 우금치 전투 이후 패퇴하던 동학농민군 일부가 금산으로 들어왔다. 10월 22일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부수암 주위를 둘러싼 가운데 민보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0월 23일에는 금성산, 삽치, 민치 등에서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여 금산을 점령하였다.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금산을 점령하고 보름간 머문 뒤에 금산을 떠났다. 이들은 진산군을 거쳐 회덕, 유성을 지나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다수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진잠, 연산, 진안, 고산 등에서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였으나 김개남이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김개남 부대가 떠난 이후에도 일본군과의 격전은 이어졌다. 영동군 양산 부근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금산군으로 퇴각하였다. 금산으로 진입하려던 일본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하여 결국 퇴각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11월 10일에 금산으로, 12일에는 진산으로 진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은 연산과 진산의 경계 지역, 용담 지역, 진안, 고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일본군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이 금산 인접 지역에서 일본군 부대에 패하자 금산과 진산의 지역 상황도 변하였다. 금산군 백성들은 일본군이 금산에 진입하자 적극 환영하였으며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진산군 백성들은 일본군을 피해 모두 도망하였다. 이는 진산군의 수령과 백성들이 다수가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결과로 나타났다.
[결과]
금산 지역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는 대둔산에서 벌어졌다. 일본군과 관군은 연합작전을 시행하면서 11월부터 12월까지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을 진행하였다. 진산군 출신 동학농민군의 다수가 대둔산에 숨어들었다. 당시 대둔산에 웅거하며 저항한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진산 출신이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인하여 전력이 약화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에 의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진산군에 최후로 남아 있던 사람들도 이듬해 1월 진압됨에 따라서 금산과 진산의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