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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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 忠烈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356-10[상가리 10-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건립 시기/일시 | 18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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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이전 시기/일시 | 1956년 - 금산 충렬사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상가리 10-2에 이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9년 - 금산 충렬사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 금산 충렬사 삼세사충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산 충렬사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금산 충렬사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356-10[상가리 10-2]![]() |
성격 | 사당 |
양식 | 익공식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해주 오씨 문중 |
관리자 | 해주 오씨 문중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금산 충렬사(錦山 忠烈祠)는 해주 오씨(海州 吳氏)의 삼세사충신(三世四忠臣)을 문중에서 배향한 사당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순천도호부사를 지낸 오응정(吳應鼎)과 오응정의 장남 오욱(吳稶), 차남 오직(吳稷), 오직의 아들 오방언(吳邦彦) 등 3대에 걸쳐 4충신을 모시고 있다. 오응정은 정유재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였고, 전라도방어사로 왜적과 남원성(南原城)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남 오욱도 아버지와 함께 같은 날 전사하였다. 차남 오직은 광해군(光海君) 대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심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항복하게 되자 스스로 칼을 물고 김응하와 함께 자결하였다. 오직의 아들 오방언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자 한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해주오씨삼세사충렬록(海州吳氏三世四忠烈錄)』은 4명의 충신에 대한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1800년(정조 24) 송환기가 서문을 지었고, 1804년(순조 4) 발간 당시 이상수와 후손 오문선이 발문을 지었다. 충신 4명의 포장과 관련한 관문과 축문, 통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더불어 금산 충렬사의 사액을 청하는 내용과 사우 건립을 위한 지원 내용의 글이 확인된다.
[위치]
금산 충렬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10-2번지에 있다.
[변천]
금산 충렬사는 1831년(순조 31)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 문중과 금산 지역 유림이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현재의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길가에 있었다고 하며, 근처에는 금곡서원(金谷書院)이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금산 충렬사와 금곡서원 모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긴 시간이 지나 1956년에 옛 건물이 있던 곳에서 약 3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훼철 후 작게나마 재건해서인지 그 모습이 많이 초라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969년 금산군수 김현구의 지원 아래 도비와 군비를 받아 중수하였고, 1970년에는 지역 유림과 후손이 삼세사충비를 사우 내에 건립하였다. 글씨는 박찬만이 썼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익공식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자연석 그대로의 주춧돌로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지붕 옆에는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하여 풍판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현황]
금산 충렬사는 1984년 5월 17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해주 오씨 문중이다.
[의의와 평가]
금산군 지역 유림들은 매년 9월 20일 금산 충렬사에서 3대에 걸친 4명의 충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