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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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경계로서 고대부터 이어진 충청남도 금산군의 역사지리적 위상.
[금강유역권으로서 금산의 지리적 입지]
근대 이후 금강유역권에서 금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강과 금산과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금산 지역은 금산과 진산이 동일 위상의 중심지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외곽으로 북쪽과 동쪽에서 금강이 흐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금산과 진산은 금강 수운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강 수운은 20세기 들어 신작로가 개설되고, 철도가 부설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금강 수운 중심의 지역구조는 이제 도로와 철도 중심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1914년 군면의 통폐합 조치에 따라서 진산이 금산으로 병합되자, 진산과 금산으로 나누어져 있던 중심지 기능은 이제 금산 중심으로 일원화되었다.
[전근대 내륙 소금 교통로, 금산]
전근대 내륙의 경제 교통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소재는 소금의 유통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당시 공급된 소금의 대부분은 임해지에서 생산된 해염이며, 소금은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떠한 산간 벽지에도 반입되었다. 소금의 수송과 함께 같은 교통로를 통해 생활 필수품까지 이동되어서 지역 상호 간에 경제 유통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통 현상은 하나의 운송권을 형성하는 등 지역 교통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다.
산지 취락 주민들이 필요한 소금의 구입지를 선택할 때에는 수송 상 편리한 곳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결정하는데, 도로가 미비되었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부강과 같은 금강의 수운 종점이나, 강경 혹은 공주와 같은 중계 포구에서 주로 공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금강의 소금 운송 체계로 보면, 제1차 생산지로부터의 해상 수송, 제2차는 수운에 의한 운송, 제3차는 육로 운송이다. 서해안에서 소금 생산이 널리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나주에서 생산된 소금이 위주였다. 군산을 통과하여 강경의 포구에서 육로를 통해서 운송되었다. 혹은 객주들의 손을 거쳐서 지방 상인에게 매각되거나 소형 강선으로 공주나 부강까지 운송되기도 하였다.
금강유역권에서 상품 거래는 가장 큰 시장을 구성하는 강경장에서 이루어졌다. 금강 하구에서 부강까지 각 지역의 중심 포구는 육로를 통해서 소금이 공급되었는데, 대부분의 육로 운송은 인력에 의존하였다. 운반 도구는 지게가 주로 이용되었으며 1인당 운반은 10두들이 1가마가 평균이었다. 하루 동안 운송할 수 있는 거리는 50리 내외였다. 금강 유역에는 여러개의 운송로가 있었다. 옥구에서 진안과 장수에 이르는 길, 연산에서 옥천에 이르는 길, 부강에서 보은으로 이르는 길이 있었다. 이 가운데 금산과 관련된 길은 강경에서 금산에 이르는 길과 금산에서 영동과 황간을 거쳐서 추풍령에 이르는 길이다.
강경에서 금산에 이르는 길은 강경을 기점으로 내륙 산지에 공급하는 노선이었다. 금산분지를 지나서 무주까지 연결되었다. 소백산맥의 자연적 경계선에서 낙동강 공급권과 서로 접하게 된다. 금강까지 옛 길로는 110리 정도로 약 2일이 소요된다. 그런데 대전 중심권이 형성되면서 이 길은 쇠퇴하게 되었고, 도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교통로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금산에서 영동과 황간을 거쳐서 추풍령에 이르는 길은 강경과 금산 노선의 연장선이다. 금산군 제원과 영동군 양산, 영동읍을 거쳐서 추풍령에 이른다. 금산에서 중간 상인들의 매매도 있었다. 강경에서 영동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3일이었다. 금산 이후 지역에서는 수요지에서 자급 자족용으로 현지까지 출장하여 소금을 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교통로, 백령산성]
553년과 554년 기록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백제 동북부를 공략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백제 성왕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관산성은 현재 옥천의 환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의 연합작전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는데, 신라가 다시 백제가 점유한 한강 하류 지역을 공략하여 차지하였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보복 전쟁이 관산성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이때 금산 지역이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과정에서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금산 지역에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금산 지역이 이후 계속 신라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는 진격로가 탄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탄현은 현재 금산 지방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금산 지역에 백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탄현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백제 말기에 금산 지역의 일부는 신라의 영역 아래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에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일 때 백제가 김유신의 5만 대군에 의해 당시 요새였던 탄현을 쉽게 돌파당했다는 점이 백제 패배의 한 요인이었다. 대군이 쉽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가 금산 지역의 일부를 장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가 금산의 일부 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겼다고 한다면 백제 입장에서는 완충지대 없이 바로 신라와 접경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며 백제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즉,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에는 금산 지역에서 진산과 벌곡, 운주와 양촌 사이의 길을 통과하면 바로 논산과 부여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백제로서는 신라의 침입을 1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 지역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 말기의 금산 지역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 바로 백령산성이다. 백령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 금산군 남이면의 건천리와 역평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백령산성이 위치한 건천리는 서쪽 선치봉과 동쪽 진악산을 연결하는 험준한 능선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금산은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교통이 불편할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금강 수계에 의해 상류와 하류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침식 계곡을 따라 사방으로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어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백령산성이 위치한 능선은 연산과 무주를 이어주는 교통로 상의 한 가운데 장벽을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백령산성은 서북쪽과 동남쪽으로 시작되는 하천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금산군은 서쪽으로 논산군 연산면과 노령산맥의 험준한 줄기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연산면 지역은 백제가 멸망할 때 격진지로 유명한 황산벌이 있던 곳이다. 금산에서 이 연산 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주요 교통로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금산읍에서 서쪽으로 진산을 거쳐 평탄한 계곡을 따라 벌곡 대덕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대덕리에서 다시 갈라지는데, 북쪽으로 벌곡 한삼천리를 지나 황령재를 넘으면 연산 동쪽 지역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다. 또 대덕리에서 서쪽 검천리로 나 있는 계곡을 따라 가면 옛부터 연산과 벌곡 사이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온 곰치재가 있다. 곰치재를 넘으면 바로 연산면 산직리에 이른다.
다른 하나의 교통로는 백령산성을 경유하는 것이다. 이 길은 남이면 역평리에서 서쪽으로 잣고개를 넘어 남이면 건천리에서 운주와 양촌을 거쳐 연산에 이르게 되는 길이다. 이 길은 건천리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서쪽으로 운주삼거리와 용계원을 지나는 천등산 남로와 서북쪽으로 운주 산북리로 향하는 천등산 북로가 있다. 두 길은 운주 장선리에서 합류되며 이곳에서 장선천을 따라 가면 양촌면 모촌리가 나온다. 이 길은 운주에서 연산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금산 지역의 교통요지적 성격은 고대사회에서 훨씬 중요하게 작용되었다. 백령산성이 백제 말기에 축조된 산성이라는 사실과 산성 안에서 확인된 중요 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금산 지역은 이와 같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신라와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백제 말기에 들어와 그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특히 나당연합군이 침략하는 멸망기에는 신라 5만 군의 진격로상에 놓임으로써 이 일대에서 신라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금산 지역은 백제 말기에는 신라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의자왕은 성충과 흥수의 충언을 듣지 않아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사비도성은 함락되었다. 백제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금산 지역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함으로써 신라 5만군의 침략을 사전에 저지하지 못하고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전라도 방어의 최전선, 금산]
임진왜란은 2차에 걸친 일본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침략은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시작되었다. 육상에서 관군이 일본군의 속공으로 연패를 당하고 있을 때,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남해를 제압하여 일본군의 공격과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남서해안을 돌아 바다와 육지에서 호응해 가며 북진을 계획하였으나 이순신의 수군 함대에 의해 병력 이동과 보급 수송에 차질을 빚었다. 일본군은 수륙 양면 작전에 차질을 빚자 육로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수륙 양면 작전 뿐만 아니라, 육군의 진격에서도 커다란 차질을 빚었다. 전라도 지방은 호남평야와 만경평야 등이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로 일본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역이었는데, 전라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가 금산 지역이었다.
금산의 지세는 영남에서 추풍령을 넘어 전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에 해당하였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9개 군진으로 나누어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중에서 제6진은 1만 7천여 군으로, 6월 영남을 거쳐 금산으로 침입하였다. 전라도로 침입하는 일본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별동대인 안코쿠지 에케이의 부대는 전라도를 맡게 되어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곽재우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본진과 합세하여 전라도로 침입하기 위하여 금산으로 진격했다. 이들 왜군은 금산을 점령한 후에 호남의 대도시인 전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군이 금산을 침략하기 위하여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양산, 순양, 부리를 지나 무주로 향하는 길과 충북 영동에서 월영산을 끼고 흐르는 천내강을 따라 제원으로 진격하는 길이 있었다. 무주로 향하는 길은 멀고 좁아 많은 군사들이 이동하기 곤란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보다 편한 길로 제원까지 진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이 전란 초기 금산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갯터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가 치러졌다. 금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고경명의 의병이 공격했던 제1차 금산 전투,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끌었던 의병이 공격했던 제2차 금산 전투 등을 치러야 하였다. 그리고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는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길에서 벌어졌다. 금산을 점령한 일본군이 전주로 향하는 길은 진산을 거쳐 대둔산 옆으로 지나는 이치를 넘는 길과, 남일면과 진안면을 거쳐 웅치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미리 파악한 권율과 황진은 이치에 진을 치고, 이복남과 변응정, 정담은 웅치에 진을 쳤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거둔 승리에 대하여 도승지 이항복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여기를 근본으로 삼아서 나라가 여러 해 동안 지탱하게 되었으며 동서로 나르고 끌고 하여 군수품이 한번도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고 하였다.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 전투와 금산 전투는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웅치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비록 조선군이 패하였으나, 이치 전투에서는 끝내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전투로 인하여 전라도를 보존하게 되어 후방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이치 전투는 호남 및 전주로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금산은 비록 산세가 험한 외지이기도 하지만, 전라도로 진출하는 중요 길목으로서 전라도 방어의 최전선의 지리적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