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금산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65
한자 第一次 錦山 戰鬪
영어공식명칭 The First Battle of Geum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9일연표보기 - 제1차 금산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10일연표보기 - 제1차 금산 전투 종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고경명

[정의]

1592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고경명의 의병부대 6,000여 명이 금산에 주둔하던 왜군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부대와 싸웠던 전투.

[개설]

임진왜란고경명의 의병부대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초 호서, 호남 지방은 전장이 아니었지만,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전라도순찰사 이광은 선조의 파천과 한성 함락 소식을 듣고, 어렵게 동원한 8천명의 군대를 임의로 해산시켜 버렸다. 충청도순찰사 윤선각 또한 왜군과의 전투를 피했기 때문에 왜군의 진격로에 있던 충청좌도가 대부분 함락되고 말았다. 조정의 명령으로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다시 2만명을 모아 올려 보냈으나, 이들은 소수의 왜군에게 패해 흩어져 버렸다. 한편, 한성을 점령한 왜군은 군대를 나누어 조선 곳곳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금산군에는 전라도 진군을 담당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가 들어와 금산성을 점령하고 전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한편 관군이 지리멸렬하자 전라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담양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 휘하에는 학연과 당색으로 연결된 다른 지역 의병부대가 들어오면서 6천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6월 11일 북상하기 시작하여, 태인, 전주를 거쳐 여산, 은진으로 진출하였다. 의병들은 진군 중에 임실에서 조우한 코바야카와의 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경과]

고경명의 의병부대가 북상하여 은진[현 충청남도 논산시]에 이르자 금산의 왜군이 전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따라서 고경명의 부대는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고자 부대를 돌려 연산을 거쳐 진산에 머물렀다. 연산에서 전라방어사 곽영(郭嶸)에게 금산의 왜군을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고경명은 진산에서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연락을 취하고 연합하여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헌 또한 이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은 진산에서 부대를 재편하고 7월 8일 금산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하였다. 7월 9일에는 전라방어사의 군대가 합세하여 금산성 밖 10리 지점까지 접근하여 진을 쳤고, 선봉 부대는 왜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7월 10일 이른 아침부터 전라방어사군은 금산성 북문을, 의병부대는 서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반격을 받고 전라방어사군이 무너지자, 의병 진영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과]

제1차 금산 전투는 조선 관군과 의병의 패배로 종결되었고,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전사하였으며, 의병부대 핵심 지도층이 대부분 전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경명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선비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제1차 금산 전투는 패배했지만 호남 의병 활동을 촉발하면서 왜군의 호남 공략이 어렵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또 금산에서 전주로 향하던 왜군은 비슷한 시기에 세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전략이 약화되었고,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제1차 금산 전투는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호남 방어에 중요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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