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003
한자 殉道意識과 護國精神의 故場, 錦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범

[정의]

임진왜란 시기 형성되고 발현된 순도와 호국 정신이 계승되고 있는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정신문화.

[금산전투의 의미]

금산 전투임진왜란 초반 의병이 중심이 된 조선군이 일본군으로부터 금산 지역을 되찾기 위하여 싸운 두 차례의 전투를 가리킨다. 지금까지 금산 전투는 다양한 형태로 연구되었으며 그 의미 또한 매우 강조되었다. 특히 조헌영규에 대해서는 “칠백의사와 함께 금산벌 싸움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육탄 돌격으로 장렬 무비한 죽음을 하였던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금산 전투가 나라의 어려움을 앞에 두고 죽음을 무릅쓴 결전이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제1차 금산 전투에 대해서는 권율의 군사와 연합 작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 제2차 금산 전투에 대해서는 관군과 의병 사이의 대립으로 문제점이 나타났으며, 조헌의 성급한 결전으로 조선 관군과의 협력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임진왜란 초기 호남의 방어가 수령들이 이끄는 관군의 방어 태세, 고경명이 이끄는 호남 의병의 역할, 그리고 관군의 역할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가능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금산 전투가 전략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

제1차 금산 전투고경명의 의병 창의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경명은 광주의 본가에 있었다. 조선군의 연이은 패배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유팽로, 양대박 등이 활약하였다. 그 결과 최대 규모의 의병이 결성되었다. 의병은 북쪽을 향해 출발하였고, 고경명이 충청도로 진입하려는 순간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군은 금산으로 들어가 약탈을 벌였고, 조선군은 권율을 비롯한 방어사, 동복현감, 전주의병장, 나주판관, 김제군수 등이 웅치이치에서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전주를 공격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고경명과 함께하던 의병들은 금산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금산으로 들어가 수백여 정예 기병으로 돌격하였으나 패하고 물러났다. 고경명은 방어사의 진영이 무너지자 미처 탈출하지 못하였고, 유팽로가 말을 타고 들어가 고경명을 호위했다. 휘하의 안영은 전사하였고, 둘째 아들 고인후 또한 적과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모든 진영이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전열을 정비하다가 고경명 마저 전사하였다. 조헌고경명의 전사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편지를 보내 “금산의 적은 복심의 병이다”라며 금산 탈환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경명의 시신은 금산의 산 중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한 동안 적이 주둔하고 있어 즉시 수습하지 못하다가, 아들 고종후 등이 의병과 승군에게 부탁하여 시신을 찾아왔다. 화순현 흑토평 언덕에 장사를 지내고 이후 장성현 오동리에 이장하였다.

제2차 금산 전투는 청주성 탈환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옥천에 있던 조헌은 선조의 파천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청주에서 의병을 모으지 못하고, 옥천에서 문인들을 모아 겨우 집결할 수 있었다. 호서와 영남 지방에 격문을 보내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주를 거쳐 회덕으로 향할 즈음 일본군이 청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청주로 향하여 당시 영규를 따르던 800명의 승군과 함께 연계하기로 하였다. 즉 의승군이 조헌의 지휘를 받기로 한 것이었다. 의병이 청주성을 공격하여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다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는데, 소나기가 내리고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내려가자 병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이에 조헌은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진영을 퇴각시켰다. 그 사이 일본군이 성을 비우고 달아나니, 마침내 8월 1일 조헌영규의 의병군은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의병과 관군이 청주성에 입성하였다. 조헌은 근왕을 결심하고 온양에 이르렀으나 호남과 호서를 침범하려는 금산의 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순찰사 윤선각이 그를 설득했다. 결국 조헌은 군사를 공주로 돌렸다. 금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주변 고을을 자주 습격하였다. 8월 16일, 조헌영규와 함께 금산으로 향하였다. 조헌은 눈물을 흘리며 “지금 임금이 어디에 계시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이 있음을 알 뿐이다”라고 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조헌영규의 전진을 만류하였으나 그들은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그들의 병력이 많지 않음을 정탐하고 의병이 미쳐 진영을 펼치기 전에 공격하였다. 연곤평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조헌영규가 이끄는 의병은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금산 전투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아쉬움과 비판이 존재했다. 그러나 금산 전투의 주역들은 조선군이 방어전에 연이어 실패하며 수도가 함락되기에 이른 벼랑 끝의 상황에서 적과 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였으나 피할 수 있는 희생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들의 희생이 전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정신적인 효과와 더불어, 실질적으로도 적에게 손상을 입혀 결과적으로 지역 방어에 성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억의 공간, 종용사]

칠백의총 관련 유적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의총(義塚)이었다. 본래 의총은 유골을 묻어주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승정원에서는 “각 도로 하여금 죽은 사람의 시체를 수습하여 의총을 만들고 특별히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을 하유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직후 여러 전투 과정에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인물들을 위한 의총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다. 칠백의총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성된 의총 중 하나였다. 다만 칠백의총은 다른 의총과는 달리 누가 어떠한 과정에서 순절했는가가 매우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사례이다. 유형원이 지은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군 북쪽 10리에 있다. 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치다가, 이곳에서 힘이 다하다 죽었다. 아들 조완기와 휘하 군사 700명도 모두 따라서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뼈를 거둬 묻고는 칠백의총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총이 만들어진 뒤에 우리는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라고 부르는 순의비가 세워졌다. 1603년에 세워졌고, 의총 앞에 조성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호서와 호남의 유생들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글은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었다.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했고, 이름을 순의비라고 했다”고 하였다. 의총과 순의비가 세워진 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의단(義壇)이 조성되었다.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의총의 동쪽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조헌의 충의를 사모하여 단을 쌓고 제사지낸다. 조헌과 동시에 고경명도 역시 의병으로 금산군 땅에서 죽었으므로 함께 제사를 지낸다. 또한 조헌의 아들 완기와 경명의 아들 인후 및 이광윤, 유팽로도 함께 지낸다. 그 아래 단에는 그 휘하의 700의사를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다. 한편 『열읍원우사적』에는 1634년(인조 12) 금산군수 김성발과 제원찰방 조평이 상의하여 의총 앞 높은 언덕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일 『금산군읍지』에서는 단의 명칭을 ‘중봉장단(重峰將壇)’이라고 표현했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칠백의총조헌 뿐만 아니라 금산에서 순절한 다른 여러 의병들의 제사를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 처음 의총과 순의비를 건립할 당시만 하더라도 조헌을 중심으로 기념 공간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다 보니, 인근 금산 지역에서 순절한 다른 의병들도 제사 지낼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고경명, 조헌의 아들, 고경명의 아들, 그 휘하 의병들, 해남현감 변응정, 승장 영규 등을 함께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금산 지역 사람들, 금산군수와 제원찰방, 그리고 전라감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산 지역에서 순절한 의병들이 칠백의총에 모두 하나의 기념 공간으로 모셔진 것은 금산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투쟁을 기억하고 이를 전승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금산은 이제 임진왜란의 중요 전투인 금산 전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자리하게 된 셈이다.

[추모의 공간, 칠백의총]

흥선대원군은 지방 유림들의 공간이었던 서원을 강제로 철폐시켰다. 금산의 대표적인 사우였던 종용사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하자 서원의 복설 흐름 속에서 종용사도 다시 건립되었다. 1896년 금산군수 서재우는 “종용사 의단은 조헌고경명의 대의를 인정하여 ‘종용사’라는 사액을 받은 이후 춘추로 제향을 지냈는데 서원 철폐 이후 조정의 처분을 다시받아 단을 설치하고 제향을 시작했는데 제향 비용을 마련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가을 제향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금산 지역의 대표 추모 공간이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제향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1925년 종용사는 금산유교진흥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종용사에는 매년 수입이 있었고 이중 절반 이상의 비용을 춘추 제사에 지출했다. 제향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1937년, 금성면 의총리 종용사에서 추계대제를 지냈는데 금산군수를 비롯하여 군내 유림들이 다수 참석하여 정숙하게 거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면서 조선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재들이 수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금산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의병장 및 관군 관련 문화재가 다수 존재하였다. 종용사에 위치한 일군순의비, 고경명의 순절비, 영규대사의 승장비, 권율 장군의 이치대첩비 모두 그 대상이 되었다. 결국 이 비석들은 이 당시에 모두 파손되어 부서졌다. 지금도 여전히 부서진 채 그대로 남아 있는 비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 반민특위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금산군에서 가장 역점을 둔 3대 사건 중 하나가 칠백의사총과 종용당 건물 철거 사건이었다. 신문에 따르면 전북 특별 제1조사과장이 금산에 당도하여 “우리 민족 정기를 여지없이 짓밟았던” 사건 중 하나로 이를 선택하였다.

해방 직후 금산 지역사회에서는 종용사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52년을 기점으로 지역사회에서 성대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1952년은 칠백의사가 전사한 6주갑, 즉 360년이 되는 해였다. 지역사회에서는 자손과 유림을 대상으로 기념시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칠백의총에서의 제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문화재로서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부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1958년 고적으로 추가 결정되었고, 1963년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칠백의총의 관리는 박정희가 1963년 참배하면서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유적지가 황폐하다고 보고 보수정화를 지시한 이후 종용사를 신축하고 강당을 개축하였으며 분묘를 확장하고, 일군순의비를 개건하였다. 1966년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을 건립하고, 1970년에는 칠백의총의 경내를 더 성스럽고 규모있게 확장하라고 지시했다. 지금과 같은 성역화된 형태의 칠백의총은 1960년대 여러 차례의 보수정화 사업과 1970년대 1차와 2차 성역화사업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성역화가 마무리되자 1975년 칠백의총의 관리 부처가 변경되었다.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충청남도에서 관리하던 칠백의총을 문화공보부가 관리하도록 하였고 칠백의총관리소를 두어 소장을 두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1976년에는 제향일이 변경되었다. 칠백의총관리소에서 주관하는 칠백의사 순의제향의 일자를 매년 음력 8월 18일에서 양력 9월 23일로 바꾸었다. 9월 23일은 음력인 1592년 8월 18일을 양력 일자로 바꾼 날짜로 현재는 9월 23일 순의제향을 지내고 있다.

칠백의총은 본래 금산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그러나 금산 지역의 백성들은 단지 역사로만 남기지 않았다. 그곳은 금산 지역의 백성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의총, 순의비, 제단, 사우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복합적인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기억을 추모하기 위한 발길이 점차 이어졌다. 유학자들이 참배를 하면서 다양한 시문을 남겼다. 일제시대에도 이어진 제향은 일제 말기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해방 이후 금산 지역민을 중심으로 다시 제향을 이어나갔다. 추모의 공간이 금산 지역민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바뀌게 된 것은 박정희의 성역화 사업의 결과였다. 관리 주체가 충청남도에서 문화재청으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국가 주도 제향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