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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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圭 |
이칭/별칭 | 기허당(騎虛堂) |
분야 | 종교/불교,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활동 사항]
영규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계룡산에 있는 갑사에 들어가 출가하고, 이후에는 휴정의 문하에서 불법을 깨우쳤다. 공주에 있는 청련암에서 선장을 가지고 무예 익히는 것을 즐겨 했다고 전한다.
1592년 8월 금산성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 1만여 명을 조헌과 영규가 공격하였다. 1차 금산 전투에서 관군이 일본군에 패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충청도에서는 조헌과 더불어 의승장 영규가 의병을 일으켰다. 청주성 수복 이후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이 전라도 지방으로 일본군이 진군할 것을 예상하여 금산으로 가서 일본군을 토벌하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영규와 의병은 군병을 거느리고 금산성의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주에 남아 있던 의병은 많지 않았고, 700여명을 거느리고 금산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성에서 나와 선제공격을 하였다. 전날 밤 의병의 배후에 투입된 일본군도 의병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적에 의해 포위에 빠진 의병들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조헌과 영규는 의병 700여명과 함께 1592년 9월 23일 연곤평에서 전사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에 영규대사묘가 조성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계룡산 갑사의 진입로 입구 사이에 있다. 묘소 앞에는 ‘의병승장군영규지묘(義兵僧將軍靈圭之墓)’라고 쓰여 있다. 1810년 후손 박경진과 박경윤 형제가 세운 것이다.
[상훈과 추모]
선조는 영규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하였으며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의승 영규를 비롯한 700의총에 대한 치제를 주기적으로 시행하였다. 1772년(영조 48) 1월, 영조는 하교를 내려서 의승 영규와 칠백의총에 대하여 치제(致祭)를 하도록 하였다. 사관은 이 명령을 두고 영조를 구갑(舊甲)이 돌아온데 대해 감개가 일어나서였다고 기록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영규는 조헌, 고경명, 변응정과 더불어 칠백의총 묘역에 있는 종용사(從容祠)에 모셔져 있으며, 종용사의 위패를 비롯하여, 의병승장비와 같은 추모비, 보석사의 의선각에 있던 영정 등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