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63
한자 雄峙 戰鬪
영어공식명칭 The Battle of Ungch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7일연표보기 - 웅치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9일연표보기 - 웅치 전투 종결
성격 전투

[정의]

임진왜란 시기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 주둔하던 왜군의 전주 공격을 막기 위해 1592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웅치에서 조선군과 의병이 왜군과 함께 맞서 싸웠던 전투.

[개설]

1592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전라도를 침략하고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조선군과 의병이 함께 싸웠던 전투였다. 이때 왜군은 금산을 거쳐 서북쪽으로는 이치로 진군하였고, 서남쪽으로는 진안군을 거쳐 웅치로 진군하였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여 부산을 거쳐 한양과 의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 때 왜군은 군대를 9개의 진으로 나누었는데, 이 중 제6진이 금산으로 침입하였다. 금산을 지나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6월 23일 금산성을 점령한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대둔산이치를 넘는 길과 남일면과 진안군을 거쳐 웅치를 넘는 길이 그것이었다. 조선군 또한 이러한 왜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치웅치에 모두 군대를 배치하였다. 웅치에는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이 방어를 위해 주둔하였고, 전주에서 황박(黃珀)이 의병을 이끌고 힘을 보탰다. 금산은 전라도를 공격할 수도, 방어할 수도 있는 전략적 요충지었던 것이다.

[경과]

조선군은 웅치에 진을 치고 방어에 임했다. 이복남의 부대가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1선을 이루었고, 황박의 부대가 그 위에 진을 치고 2선을 구성했다. 그리고 정담은 아래에 주둔하여 3선을 갖추었다. 7월 7일 왜군 선봉부대가 접근하여 전투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8일 새벽 진안 방면의 왜군 본대가 웅치에 접근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군은 왜병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새벽부터 동틀 때까지의 전투로 왜병은 잠시 퇴각하는 듯 했지만, 여러 부대가 나누어서 재차 공격 하였다.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진이 붕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이 전사하였다.

[결과]

이복남, 황박 등은 왜군과 싸우면서 안덕원으로 후퇴하였다. 전주성에서 10리 떨어진 위치였다. 왜군은 웅치 전투에서 접전을 벌였기 때문에, 비록 전투에서 이겨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주로 진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전주성에서 방어하고 있는 전라감사의 군대와 안덕원에 주둔한 이복남의 군대가 협공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왜군은 남원에서 군대를 이끌고 웅치로 가던 황진의 군대와 안덕원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여 금산, 무주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의의와 평가]

웅치에서 조선군은 왜군을 막지 못하고 고개를 내어주었으나, 왜군에게 타격을 입혀 결과적으로 전주와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전투에서 졌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금산에서 벌어진 웅치 전투는 전라도를 지킨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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