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22
한자 李福男
영어공식명칭 Lee Boknam
이칭/별칭 수보(綏甫),충장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이복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이복남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이복남 전라도병마절도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이복남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12년 - 이복남 남원 충렬사 배향
사당|배향지 남원 충렬사 -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89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우계
대표 관직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금산군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웅치에서 물리친 조선 전기 무신.

[가계]

본관은 우계(羽溪)이며 자는 수보(綏甫)이고, 아버지는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낸 이준헌(李遵憲)이다.

[활동 사항]

1555년 출생하여 1588년 34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나주판관으로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1592년 6월 23일 경 금산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조선군은 금산에서 전주로 향하는 길목인 웅치(熊峙)이치(梨峙)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복남은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함께 웅치의 험준한 곳을 지키며 대비하였다. 1592년 7월 8일 무렵 일본군이 웅치를 공격하여 하루종일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으나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하고 웅치가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이복남은 혈전 끝에 안덕원(安德院)으로 후퇴하여 대기하였는데 남원에서 웅치로 향하던 동복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금산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이복남웅치 전투에서 “이름이 드러났다”고 할 만큼 크게 활약하였으며 이후 전라방어사, 남원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나주목사를 지냈다. 1597년 2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1597년 남원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615년 충신 대열에 수록되었으며 1711년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1612년 건립되고 1653년에 사액(賜額)을 받은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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