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736
한자 任永信
영어공식명칭 Louise Yim
이칭/별칭 승당(承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병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11월 20일연표보기 - 임영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임영신 심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임영신 기전여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임영신 양대학교 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임영신 징역 7개월 선고
수학 시기/일시 1921년 - 임영신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임영신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과정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임영신 중앙보육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임영신 중앙여자대학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임영신 초대 상공부장관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임영신 국회의원 보궐 선거 당선
추모 시기/일시 1963년 8월 15일연표보기 - 임영신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추모 시기/일시 1969년 12월 17일연표보기 - 임영신 청조근정훈장 수여
몰년 시기/일시 1977년 2월 16일연표보기 - 임영신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심광학교 - 충청남도 금산군
학교|수학지 기전여학교 - 전라북도 전주시
학교|수학지 남캘리포니아대학교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묘소 중앙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흑석동 221]
성격 교육자|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상공부장관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정치인.

[개설]

임영신(任永信)[1899~1977]은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다.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가계]

임영신은 1899년 11월 20일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승당(承堂)이다. 아버지는 임구환(任九桓)이고, 어머니는 김경순(金敬順)이다.

[활동 사항]

임영신은 어린 시절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1914년 금산 지역 사립 학교인 심광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전주 기전여학교에 진학하였다. 기전여학교 재학 시절에 여성 해방에 관심을 두고 교내에서 ‘쓰개치마 입기 거부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18년에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천안 양대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천안에서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으며, 3월 12일에는 전주 남문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징역 7개월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나 3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이후 한동안 금산 자택에 머물다가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21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공주의 영명여학교, 서울의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하다가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동지회에 가담하여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31년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에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중앙사범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체류하다가 1940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일제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협조하자’는 내용의 강연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김활란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였으며, 이승만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정치 행보를 같이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에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46년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중앙여자대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중앙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상공부장관으로 입각하였으며, 1949년 경상북도 안동시 을선거구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나가 장택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보궐 선거 과정에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대구메리야스 공장 소유의 면사를 담보로 거액을 융자받아 사용한 혐의로 기소되는 일을 겪었다.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여론에 밀려 1949년 6월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다시 당선되었으며, 6·25전쟁 시기에는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전쟁 도중이던 1952년에 실시된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자유당 내에서 이기붕이 대두함에 따라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 들어선 장면 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추진하자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박정희를 지지하였다. 이후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창당 발기 위원이 되어 박정희 정권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부터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맡았으며, 1963년 대한부인회와 통합된 후에는 8년간 회장을 지냈다. 1965~1972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민주공화당 고문,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 통일주체국민의회 대의원 등을 역임하다가 1977년 2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임영신은 사후 서울 중앙대학교 교정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임영신은 1963년 8월 15일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1969년 12월 17일 청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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