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735 |
---|---|
한자 | 柳珍山 |
영어공식명칭 | Yu Chinsan |
이칭/별칭 | 유영필(柳永弼),옥계(玉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병택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10월 18일![]() |
---|---|
수학 시기/일시 | 1923년 - 유진산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 유진산 와세다대학 예과 제1고등학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유진산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7년 - 유진산 신민당 부총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유진산 신민당 총재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4월 28일![]() |
추모 시기/일시 | 1974년 5월 24일![]() |
출생지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 |
학교|수학지 | 경성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보성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와세다대학 - 일본 |
묘소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 |
성격 | 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문화(文化) |
대표 경력 | 신민당 총재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유진산(柳珍山)[1905~1974]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54년 제3대 총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7회 연속 당선된 정치인이다. 민주당 구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민중당, 신민당 등 야당의 주도적 인물로 다양한 정치 행적을 남겼다.
[가계]
유진산은 1905년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유영필(柳永弼)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아버지는 유경덕(柳敬德),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 부인은 김현신(金賢信)이다.
[활동 사항]
유진산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자퇴하였으며,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여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조직하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이라는 제목의 서적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난창[南昌]에서 한인회 조직에 참여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국내로 이송,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우익 청년 단체인 흥국사를 조직하였다.
1946년에는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으며, 김두한을 조직의 감찰부장으로 임명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1947년에는 미군정의 압력으로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을 해산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단체의 명칭을 ‘청년조선총동맹’으로 바꾸고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후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들여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다른 청년 단체들과 함께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헌국회 소집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 활동 시기를 단축하자 이승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5월에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1년 국민당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제3대 총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된 후 7회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인사들이 모여 신당 창당을 준비하던 호헌동지회에 가담하였다. 이때 조봉암 영입을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조병옥, 장면 등과 함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하는 측에 섰다. 이후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민주당이 창당되었을 때 중앙상무위원에 피선되었고, 1956년 민주당 노동부장을 거쳐 선거대책위원장까지 역임하였다.
4·19혁명 이후에는 윤보선과 힘을 합쳐 민주당 구파 계열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이 내분에 휩싸이는 가운데 민주당 구파가 장면 내각 출범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별도의 교섭단체인 민주당구파동지회를 만들어 신당 발족에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구파는 다시 협상파와 분당파로 나누어졌으며, 분당파가 주축이 되어 1960년 10월 18일 신민당을 구성하였다. 이때 유진산은 김도연 등과 함께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잠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으며, 1962년 3월 박정희의 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를 개최하는 데 앞장섰다. 민정 이양으로 박정희 정부가 구성된 뒤에는 윤보선 등과 함께 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1963년 11월 실시된 총선거에 전국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11월 26일에 치러진 제6대 총선거 준비 과정에서 민정당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지역구인 금산을 포기하고 전국구 3번으로 입후보하여 논란을 빚었다.
윤보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진산은 1964년 8월 언론윤리법안의 국회 통과로 윤보선과 불화를 빚기 시작하였다. 당시 민정당 내부에서는 여당 출신의 김진만 국회부의장과 유진산이 묵계를 맺어 법안 통과에 협력하기로 하였다는 소문이 퍼졌으며, 이 문제로 윤보선 등에 의해 제명 조치당하였다. 이후 윤보선과 대립하게 된 유진산은 1965년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한 ‘민중당 전당 대회’에서 윤보선의 반대파였던 박순천을 지지하여 당대표에 당선시켰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안’의 국회 통과로 윤보선 등 강경파들이 민중당을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하고 ‘선명 야당’을 표방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신한당에 가담하지 않고 민중당에 남았다. 이후 1967년에 분열된 야권을 통합하여 신민당이 창당되었을 때 부총재가 되었으며, 제7대 총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시 영등포구로 바꾸어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유진오의 와병으로 공석이 된 신민당 대표 선거에 나가 이재형, 정일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시 유진산은 박정희 정부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당 안팎에서 비판을 받곤 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와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한편, 제7대 대통령선거 직후 치러진 총선거에서 유진산은 후보 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한 이른바 진산파동으로 큰 논란을 빚었다. 당시 신민당원들 사이에서는 유진산이 민주공화당의 회유를 받아들여 지역구를 포기하였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이에 흥분한 당원들이 유진산의 자택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는 일이 벌어졌다. 유진산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느끼고 당대표직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유진산은 이후 김대중을 견제하기 위해 김홍일을 지원하여 당대표에 당선시켰으며, 1972년에는 자신의 계파만으로 전당 대회를 강행하여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이에 분노한 김홍일과 김대중이 유진산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는 가운데 박정희 정부가 ‘유신’을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야권은 유신 정변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잠시 내홍을 봉합하는 수순에 들어갔으며, 유진산도 당대표직 사의 뜻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73년 제9대 총선거를 앞두고 유진산이 반대파에 속한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야권은 다시금 분열하였다. 유진산은 1974년에 접어들어 유신 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하였지만, 4월 28일 지병인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유진산은 정적과 쉽게 타협한다는 평가를 받곤 하였지만, 동시에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오늘날 유진산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1972년 정계 회고록인 『해뜨는 지평선』을 간행하였다.
[묘소]
유진산의 무덤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진산은 사후인 1974년 5월 24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