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14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Contemporary Times in Geumsa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윤희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남도 금산군의 역사.

[개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금산군은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이후 가까운 대도시인 대전광역시의 농산물 수요를 공급하기 위한 배후생산지로서 근교농업이 발전하였고 이를 토대로 식품가공업 등을 중심으로 한 농공단지가 설립되었다.

[역사적 변천]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충청남도 금산군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소속이었다. 해방 직후 금산군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 금산지부가 결성되어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대신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찬탁과 반탁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금산군지회가 좌익계열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였고, 점차 우익계열이 금산군 대중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1948년 5·10 선거에서는 금산군의 투표율이 94%였으며, 정해준이 차점자인 조문형을 누르고 제헌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7월 24일 북한군이 금산을 점령하였다. 점령 기간 75일간 100여명의 주민이 학살되거나 전주 감옥으로 끌어갔고,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총 2,563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후 복구가 진행되면서 양곡 증산을 위해 저수지, 용수로 공사가 확대되었고, 1963년에는 금산군 6개 지구에 약 67㎢가 개간되었다.

금산군의 기간시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크게 확충되었다. 진산~마전간, 진산~전주간, 금산~제원간, 금산~진산간, 금산~무주간의 도로가 포장되었고,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에서 남이면 상금리 간 도로가 개설되었다.

1970년 12월 제원대교가 개통되었고, 1980년대 초에는 부리면 수통리 구름다리와 수통대교가 개통되었다.

한편 금산군의 생활권이 충청남도와 밀접하기 때문에 충청남도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산군은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내부리(內釜里)에 있었던 군북면사무소는 1953년 12월에 두두리로 신축·이전 하였고, 1962년 5월에는 군북면 내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복수면 용지리가 추부면에 편입되어 추부면 용지리가 되었다.

금산읍과 9개 면의 행정리는 인구증가에 따른 행정 수요의 증대로 꾸준히 증가하여 1960년에 156개 리였던 것이 1980년에는 231개 리로 증가하였다. 2010년에는 253개 리로 증가하였고, 2016년에는 258개 리로 조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면 인구는 1961년 11만명에서 1998년에는 6만 7천명, 2022년에는 4만 8천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970년 이후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충청남도 금산군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고, 지방의 불균형이 확대되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서도 1990년대 도농통합을 지향하는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영동과 옥천 편입, 대전 편입 등의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고, 무주, 진안, 장수 등과의 통합론도 제기되었다.

또한 충청남도 도청 이전 논의가 제기되면서 2007년에는 대전광역시 편입 논의, 2010년에는 대전, 옥천, 금산 통합 논의가 나왔지만,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발전 현황과 의의]

농지 확대와 관련하여, 전후 복구가 진행되면서 양곡 증산을 위해 저수지, 용수로 공사가 확대되었고, 1963년에는 금산군 6개 지구에 약 67㎢가 개간되었다.

금산인삼은 한국 인삼의 종주지로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삼시장이 5일마다 열렸다. 1969년 충청남도 금산군 인삼 재배면적은 충청남도 전체 인삼 재배면적의 90%에 달했다. 그러나 그 비중은 점차 낮아졌고, 1990년대에는 충청남도 전체의 70%까지 떨어졌다. 농가소득을 위해 전국 각 지자체가 인삼 재배를 장려하여 재배 면적이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1963년 충청남도 편입 이후 대전광역시의 발전으로 충청남도 금산군은 근교농업이 증가하였다.

1980년 12월 정부는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을 막고 지방정주권 개발을 위한 소도읍 발전계획을 확정하였고, 충청남도 금산군이 소도읍으로 지정되었다. 소도읍사업으로 가로정비, 상하수도 시설, 상가의 연쇄화, 오물처리장 설치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전광역시 근교 상업농 지대이면서도 임야가 7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산지 지형을 이용하여 버섯, 콩, 팥, 메밀, 녹누, 들깨 등의 지배가 활성화되었다.

1970년 6월 통신근대화의 상징인 금산지구국이 개국되었지만, 산업시설 유치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에 금산산업단지가 건설되었고, 현재는 푸드 관련 사업체 등 13개 회사가 입주하고 있다. 이외에 추부면, 복수면, 금성면에 3개의 농공단지가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남도 금산군은 가장 유명한 인삼 재배지라는 과거의 명성에 머무르지 않고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 등 소비도시에 먹거리를 공급하는 근교농업지대로 발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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