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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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浦齋書院 - |
이칭/별칭 | 석포재서원지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창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규완 |
건립 시기/일시 | 17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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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871년![]() |
소재지 | 석포재서원 터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창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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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서원 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창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터.
[개설]
석포재서원(石浦齋書院)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17세기 후반, 허목은 관직에 있으면서 남인으로서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문제로 서인 세력과 심한 갈등을 빚었고, 남인의 영수(領袖)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허목은 나주미천서원(羅州眉泉書院)[전라남도 기념물 제29호]과 창원 회원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금산군 부리면에 있던 석포재서원은 흥미롭다. 남인은 서인과 예송 논쟁을 벌이고, 숙종조 갑술환국(甲戌換局)을 겪으면서 세력이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특히,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에 남인 가문이 연루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탕평(蕩平) 정치를 위해 의식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으나, 정조가 죽은 후 탕평 정국이 와해되면서 남인은 다시 중앙 정계 요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중앙 정계에서 남인의 위상은 지역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영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서인계 서원이 다수이고, 남인계 서원은 소수이다.
[변천]
석포재서원은 1719년(숙종 45) 지방 유림의 주도로 허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이후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위치]
석포재서원 터는 금산군 부리면 창평2리[라천리] 내내골에 있다.
[현황]
현재 석포재서원이 있던 자리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관련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석포재서원은 금산군 지역에 있던 유일한 남인계 서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