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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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泉齋書院 - |
이칭/별칭 | 산천재서원지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금산로 471[음대리 177-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영숙 |
건립 시기/일시 | 16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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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현 소재지 | 산천재서원 터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금산로 471[음대리 177-4]![]() |
성격 | 서원 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터.
[개설]
신천재서원(山泉齋書院)은 조선 후기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영상(影像)과 위패를 봉안하였던 서원이다.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1610~1669]와 시남(市南) 유계(兪棨)[1607~1664]가 건립하여 성리학의 진리와 예론을 연구하였으며, 윤선거가 죽은 후에 윤증이 강학과 학문 탐구의 본거지로 삼았다. 산천재서원에 대해 기록은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노서유고(魯西遺稿)』의 ‘연보’와 유계·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각각 쓴 『행장』 그리고 『시남집(市南集)』의 「산천재기(山泉齋記)」 등에 담겨 있다.
[위치]
신천재서원 터는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177-4번지에 있다. 지금은 폐교된 금일초등학교 정문 앞에 윤증 유허비가 세워 있어 이 일대가 서원 터일 것으로 추정한다.
[변천]
산천재서원은 미촌 윤선거와 시남 유계가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아래에 은둔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에 세웠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인 겨울, 윤선거와 유계는 마하산 아래에서 성리학의 진리와 예론을 연구하고, 산수를 즐기며 생활하였다. 1642년(인조 20)에 작은 재를 짓고 ‘산천재(山泉齋)’라 편액하였다. 유계의 『시남집』에 「산천재기」가 실려 있으며, ‘산천재’라고 편액한 이유를 기록하였다. 1646년(인조 24) 유계가 무안현감으로 부임하자, 윤선거는 산천재서원에 남아 유생 강론과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다. 1669년(현종 10) 윤선거가 죽은 후에는 아들 윤증이 산천재서원을 강학과 학문 탐구의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1686년(숙종 12)에 윤증이 사망하자 후학들이 윤증의 영상과 위패를 봉안하고 130여 년간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후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산천재서원은 훼철되었다. 훼철 시기에 대해 1741년(영조 17)이나 1868년(고종 5)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열읍원우사적』에 의하면 산천재서원에는 미촌 윤선거와 명재 윤증, 농은(農隱) 윤추(尹推) 3인이 배향되어 있었다. 산천재서원이 있던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증언에 의하면, 1930년대까지만 해도 3칸 정도의 사당에 영정[명재 윤선생 유허비로 보아 윤증의 영정일 것으로 추정]을 모셔 놓고 주변의 유림들[금산군 남일면 지역 인사]이 제향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당은 1940년 일본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붕괴되었고, 고직이만은 1995년까지 있었으나 헐어 내고 다시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현황]
산천재서원의 위치를 추측하게 하는 명재 윤증의 유허비가 폐교된 금일초등학교 정문 앞[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117-4번지]에 세워져 있다. 비에는 ‘명재윤선생사우지허(明齌尹先生祠宇之墟)’라고 음각되어 있다. 명재 윤선생 유허비의 뒤편으로 30m~40m 거리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다시 건축물을 짓는 과정에서 묻혀 있던 기와 조각과 벽돌, 나뭇조각 등이 상당수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이곳에 서원이나 사당과 같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
[의의와 평가]
명재 윤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사상가로 서인, 소론의 영수(領袖)였다. 당쟁을 피해 금산 지역으로 내려온 윤증이 후학 양성의 근거지로 삼았던 산천재서원은 지역의 사림 형성 과정과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산천재서원에 대한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 건립 시기, 훼철 시기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