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44
한자 兪棨
영어공식명칭 Yu Gyeo
이칭/별칭 무중(武仲),시남(市南),문충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유계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64년연표보기 - 유계 사망
성격 문인
성별
본관 기계
대표 관직|경력 이조참판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마하산 아래에 은거하였던 조선 후기의 문인.

[개설]

유계의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가계]

유계의 증조할아버지는 진사로 찬성에 추증된 유함(兪涵)이고, 할아버지는 군수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유대경(兪大儆)이며, 아버지는 참봉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유양증(兪養曾)이다. 아들로는 유명윤(兪命胤)이 있다.

[활동 사항]

유계는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에는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인조 14)에는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로서 인조를 호종하였고, 화의를 주장했던 김류와 최명길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임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금산의 마하산(麻霞山) 아래 은거하면서 산천재(山泉齋)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강학 활동을 펼쳤다. 1644년(인조 22)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49년(인조 27) 부수찬으로서 ‘성지(聖志)를 바로세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효종 즉위 이후 홍문관의 부교리로서 인조의 묘호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였으나 선왕에 대한 비방이라 하여 효종의 노여움을 샀고, 심대부(沈大孚)와 함께 귀양형에 처해졌다가 사면되었다. 이후 유계를 등용하자는 여러 논의가 일어났으나 복귀하지 못하다가 1657년(효종 8) 송시열과 송준길이 차례로 유계, 이유태의 사면, 복권을 청한 것을 계기로 관직에 복귀하였다. 효종, 현종 대에 걸쳐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승지,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664년(현종 3)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병자호란 화의 성립 이후 척화를 주장하였던 유계는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금산 지역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가례(家禮)』에 관한 글들을 정리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집필하였다. 추후 『가례원류』의 간행을 둘러싸고 저작자에 대한 시비 문제가 발발하였고, 이는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으로 비화하였다가 1716년(숙종 42)에 숙종에 의해 유계의 단독 저작으로 결정되었다. 이 밖에도 『강거문답(江居問答)』, 『여사제강(麗史提綱)』 등을 편찬하였다. 문집으로는 『시남집(市南集)』이 있다.

[묘소]

유계의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산96-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계는 1706년(숙종 32)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금강 상류에 위치한 용강서원(龍江書院)에서는 유계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을 배향하였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0년 무렵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용강서당(龍江書院)으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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