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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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宣擧 |
영어공식명칭 | Yun Seongeo |
이칭/별칭 | 길보,미촌,노서,산천재,문경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6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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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윤선거 생원시,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활동 시기/일시 | 1642년![]()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윤선거 우계속집 편차, 성문준의 문집 교정 |
몰년 시기/일시 | 1669년![]() |
추모 시기/일시 | 1710년 - 윤선거 영의정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11년 - 윤선거 시호 문경 추시 |
추모 시기/일시 | 1723년 - 윤선거 노강서원 배향 |
거주|이주지 | 산천재서원 유허비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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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윤선거 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307-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파평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거주하였던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할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내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은 윤황(尹煌)이다. 윤황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사위로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자이다.
[활동 사항]
1610년 출생하여 1633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후금(後金)의 사신을 죽이고 가져온 문서를 불태울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될 때 윤선거의 친구들은 모두 죽고 중부(仲父) 윤전(尹烇)도 자결하였다. 윤선거의 부인 공주 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켰다. 윤선거는 홀로 탈출하여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른바 강도(江都) 사건은 윤선거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이후에 윤선거는 여러 차례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척화(斥和) 상소를 올렸다가 영동에 유배되었던 아버지 윤황이 석방되자 1638년 윤선거는 금산의 남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1642년 유계(兪棨)와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아래 서실을 짓고 이름을 ‘산천(山泉)’이라 하였다. 유계, 송시열(宋時烈), 이유태(李惟泰) 등 호서 사림들과 만나는 공간이 바로 산천재(山泉齋)였다.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던 윤선거는 1669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우계선생연보』, 『계갑록』 등을 편집하였고, 유계와 『가례원류』를 완성하였으며, 호서 사림들과 고례나 향약 등을 강학하면서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윤선거의 저서로는 아들 윤증((尹拯)이 정리하고 편집하여 간행한 『노서유고(魯西遺稿)』가 있는데,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307-1에 위치한다.
[상훈과 추모]
1669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71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11년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1723년 노강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금산의 산천재서원에도 배향되었다는 기록이 『열읍원우사적』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