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48
한자 許穆
영어공식명칭 Heo Mok
이칭/별칭 문보(文甫),화보(和甫),미수(眉叟),문정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허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허목 정릉참봉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허목 장령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5년 - 허목 우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 허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9년 - 석포재서원 건립
묘소|단소 미수허목공묘역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90-3
사당|배향지 석포재서원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창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천
대표 관직|경력 우의정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에 위치하였던 제원역(濟原驛)은 찰방이 파견되어 주변 5개 역을 관할하는 역도였던 제원도(濟原道)의 중심이었다. 제원역이 설치되었던 곳에는 말을 씻기는 장소라는 뜻의 ‘세마지(洗馬地)’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어풍대(御風臺)’가 새겨진 절벽이 있다. 어풍대 각자(刻字)에 관한 전설은 허목이 제원찰방을 지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원리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고, 허목은 그 원인이 세마지에 빠져서 죽은 말이 잡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허목은 바람을 모시는 곳이라는 뜻으로 ‘어풍대’라는 글자를 새기게 하여 재난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연대기 자료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실린 연보 및 이익(李瀷)이 쓴 신도비에서 허목이 제원찰방에 임명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가계]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홍원(洪原)으로 귀양갔던 좌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다.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활동 사항]

1595년 출생하여 56세가 되던 1650년에 정릉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한 달 만에 사직하였다. 1651년 내시교관에 제수되었으나 1652년 2월에 사직하였다. 1656년 조지서 별좌에 제수되었고 공조좌랑으로 승진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56 8월 용궁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산림(山林)의 인재를 얻고자 했던 효종이 1657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자 효종을 직접 만나 소를 올리고 다시금 사직하였다. 허목은 1660년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기간이 잘못되었다는 상소를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서인(西人)의 기년복(朞年服) 입장에 대해 허목은 자최삼년(齊衰三年)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후 삼척부사로 외직에 나갔다. 허목은 숙종 즉위 이후 남인(南人)들의 집권과 함께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였고 허목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1682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집으로는 93권 25책으로 구성된 『미수기언』이 있다.

[묘소]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90-3에 위치하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허목의 관작은 1688년에 회복되었고, 1691년에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湄江書院)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었던 석포재서원(石浦齋書院)은 1719년에 건립되어 허목을 배향하였는데, 1871년 훼철된 이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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