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04
한자 錦山 要光里 吳國獻 旌閭
이칭/별칭 해주 오씨 구효자 정려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18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33년 -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3리에서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181로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33년 -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 보수
현 소재지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181 지도보기
원소재지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3리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에 있는 개항기 정려.

[개설]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錦山 要光里 吳國獻 旌閭)오국헌(吳國獻)[1599~1672]과 오국헌 후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이다. 오국헌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베어 효험이 있게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여묘살이를 하며 죽만 마셨고, 그 후로 기일이 오면 초상 때와 같이 애통해 하였다. 오국헌의 효행은 정조 연간에 간행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실릴 만큼 널리 알려졌다. 오국헌의 아들 오달휘·오연휘·오수휘·오일휘·오건휘 모두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또한 손자 오석규와 후손 오태증·오태준도 효행으로 이름을 남겼다.

[위치]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181번지에 있다.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방면 요광3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로 약 200~300m 떨어져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금산군 추부면 요광3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비닐하우스를 지나 직진하면 꽤 큰 터에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가 있다.

[변천]

1888년(고종 25)에 오국헌오국헌의 아들 5명, 그리고 손자 오석규와 후손 오태증·오태준 등 9명이 함께 명정(銘旌)을 받았다. 이후 1904년(고종 41)에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를 건립하였다. 원래 정려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3리 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문중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같은 해에 보수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도리식 가구에 처마는 겹처마이다. 시멘트 기단 위에 팔각의 고주초석(高柱礎石)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사면에는 홍살이 둘러져 있고 하방은 시멘트로 막아 놓았다. 정면에 ‘구효정려(九孝旌閭)’라는 현판[높이 98㎝, 너비 30㎝]이 걸려 있다. 정려 내부에는 5개의 명정 현판과 중수기, 정려기가 걸려 있다. 남쪽과 동쪽에 걸려 있는 명정 현판은 오국헌과 아들 오달휘·오연휘·오수휘·오일휘·오건휘 형제와 손자 오석규, 후손 오태증·오태준의 것이다. 중수기는 1969년 후손 오재영(吳在泳)이 쓴 ‘선조정려중수기(先朝旌閭重修記)’[가로 89㎝, 세로 49㎝]이고, 정려기는 1905년(고종 42) 송종규(宋鍾奎)가 쓴 ‘해주오씨구효정려기(海州吳氏九孝旌閭記)’[가로 175㎝, 세로 7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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