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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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성호 |
[정의]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 산지에 조성된 군사 및 행정 목적의 시설.
[개설]
금산 지역은 험준한 산지와 함께 금강 상류에 위치하며 금강에 만입하는 지천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발달한 곳이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로 인하여 금산 지역은 특히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면서 많은 수의 산성이 축조되었다. 산성은 축성 재료에 따라서 토성, 토석혼축성, 석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금산 지역에서는 수당리토성을 제외하면 모두 할석을 치석하여 쌓은 석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기에 따라 성곽의 축성 재료에 일정한 변화상이 확인되는 지역도 있지만, 금산 지역은 주변에서 수습이 용이한 석재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석축 산성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하나의 지역적 특징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배경]
현재 금산 지역은 백제의 항산현[추부면], 진동현[진산면], 진잉을군[금산읍], 두시이현[부리면] 4개 권역으로 구분된다. 삼국시대 산성은 군사적인 목적의 방어 기능과 함께 주변을 지배하는 행정 치소의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현재 각 지역의 중심이 되는 성은 추부면 지역의 마전리 산성, 진산면의 진산성, 금산읍의 계진리 산성, 부리면의 평촌리 산성이었다. 중심지를 연결하여 교통로가 연결되는 주요 지점에는 보조성의 기능을 하는 산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방어체계를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고학적인 조사가 유일하게 진행된 백령성은 이러한 중심 치소에서 벗어나 있다. 둘레가 404m로 대형산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게 축조된 성벽과 성 내부에서 목곽 저장고를 비롯한 건물지 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백제 사비기에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한 산성에서 확인되는 글씨가 찍힌 인각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점은 백령성이 백제의 변경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곳이라는 것을 반증해 준다.
삼국 시대에 처음 축성된 산성은 대부분 고려 시대, 길게는 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대암리 산성, 저곡리 산성과 같이 삼국 시대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은 산성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산성은 피난을 목적으로 고려시대 이후에 별도로 쌓여진 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에 권율의 이치고개 전투와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이러한 승전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으나 실제로 조선의 군사적인 배치나 왜군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따라서 향후 조사를 통하여 고려 시대 이후에 초축된 산성에 대하여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한다면, 금산 지역의 역사는 보다 풍부해 질 것이다.
[현황]
삼국 시대에 관련된 문헌 기록을 통하여 양국 간의 접전이 벌어진 산성을 명확하게 비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554년 금산의 북쪽에 위치한 옥천 관산성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한 사건이나 655년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영동군 양산면 일대에 위치한 조천성 전투를 감안한다면 후방에 위치한 금산 지역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이와 같이 금산 지역 산성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술조사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된 곳은 백령산성 1개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조선 시대 행정 치소로 기능한 금산읍성을 제외하면 산지에 축조된 산성이 총 19개소에 이른다. 이 중에서 백제 토기나 기와가 수습되어 처음 축조된 시기가 삼국 시대로 볼 수 있는 산성은 13개소이다.
삼국 시대에 축성된 곳으로 추정되는 산성은 백령산성, 구례리 산성, 마전리 산성, 계원봉 보루, 핏재산성, 금성산성, 만악리 산성, 곡남리 산성, 진산성, 계진리 산성, 수당리토성, 천내리 산성, 평촌리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