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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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憲 |
영어공식명칭 | Jo Heon |
이칭/별칭 | 여식(汝式),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문열공(文烈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선 전기 문신이자 의병장.
[개설]
선조 연간 활동한 문신이자,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이고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다. 증조는 조황(趙璜), 조부는 조세우(趙世佑), 부친은 조응지(趙應祉)이며, 모친은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활동 사항]
1555년 김황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65년 성균관에 들어가고 2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8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들어가 주로 각 지방의 교수를 지냈다. 1572년 이후 중앙으로 들어와 교서관에서 근무하였고, 성절사 박희립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이후 6조의 좌랑과 성균관, 사헌부의 관직을 지냈다. 통진현감 시절 내수사 노비의 죄를 묻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1582년에는 모친을 모시고자 보은현감으로 자청하여 갔는데, 당시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587년 정여립 문제가 불거지자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외에도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 이산해의 문제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선조의 눈 밖에 나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옥천에서 상경하여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영규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자, 남은 병력을 모아 금산으로 진군하였다. 영규의 승군과 함께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막고자 하였다. 1592년 8월 18일 금산의 연곤평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수적 열세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학문과 저술]
조헌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었다. 조헌의 학문과 저술은 문집인 『중봉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초간본은 1613년 동학이었던 안방준이 조헌의 유문과 사적을 수집하여 이정구와 강항의 서발문을 받아 1615년에 발간하였다. 그리고 1740년에는 본집 13권, 부록 7권을 합하여 20권 10책으로 다시 간행하였는데 이를 경신본이라고 한다. 조헌의 문집에는 일본에 대한 상소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상황과 조선의 대응책에 대한 당시 조헌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묘소]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조헌 및 의병과 영규, 승병은 칠백의총으로 무덤이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1604년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1734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문열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조선 후기 내내 여러 차례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상소가 올라갔으나 1883년에 가서야 배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헌은 옥천의 표충사, 배천의 문회서원, 김포의 우저서원, 금산의 종용사와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 여러 곳에서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