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62
한자 義兵僧將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37년 - 영규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 9월 23일 - 영규 사망
건립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의병승장비 건립
훼손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의병승장비 훼손
복원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이후 - 의병승장비 복구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의병승장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의병승장비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의병승장비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지도보기
성격 추모비
관련 인물 영규(靈圭)
크기(높이) 243㎝[높이]|83㎝[폭]|39㎝[두께]
소유자 대한불교조계종 보석사
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보석사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에 있는, 의승장 영규를 기리는 조선 후기 추모비.

[개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임진왜란 당시 의승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다가 전사한 영규(靈圭)[1537~1592. 9. 23.]와 함께 금산 전투(錦山 戰鬪)에서 전사한 의승(義僧)의 전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의병승장비영규의 의병장으로서의 기상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영규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높은 제자였다. 공주의 청연암에서 상주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을 통곡하여 울분을 참았다. 이를 본 공주목사 허욱이 영규를 장하게 여겨 의병을 일으켰으며, 의승 수백 명을 규합하여 청주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웠다. 관군은 전멸하였으나 의승병만은 끝까지 적을 상대하였고, 이때 조헌(趙憲)의 의병과 함께 연합 군영을 형성하였다. 조헌의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금산 지역으로 가려고 하자, 영규는 홀로 가면 죽을 수 있다며 말렸다. 그러나 조헌이 끝내 가려 하자 홀로 죽게 할 수 없어 영규가 함께하였다. 결국 조헌영규금산 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다.

[건립 경위]

영규는 원래 조헌,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종용사(從容祠)에서 배향하고 있었다. 1835년(헌종 1) 법도 대인이 진악산에 각을 세우고 영규의 진영을 안치하자, 그 행적을 기록하고 공양하기 위해 1839년(헌종 5) 금산군수 조취영이 주관하여 의병승장비를 건립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직적으로 금산 지역에 있는 임진왜란 관련 비석을 훼손할 때 함께 훼손되었으며, 1945년 8·15광복 후 복구하여 다시 세워 놓았다.

[위치]

의병승장비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보석사(寶石寺) 입구에 있다.

[형태]

비신의 높이는 243㎝, 폭은 83㎝, 두께는 39㎝이다.

[금석문]

금석문의 전면에는 ‘의병승장(義兵僧將)’이라고 새겨 있는데 이는 창녕위 김병주(金炳疇)가 쓴 것이다. 뒷면에는 음기(陰記)하였는데, 영규의 행적과 설립 경위를 기록해 놓았다. 글은 당시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썼고, 글씨는 전 금산군수 조최영(趙㝡永)이 썼다. 모두 풍양 조씨 인물이다. 우측면에는 화주(化主)였던 악봉대인(樂峯大仁)과 춘담태연(春潭太演), 도감(都監)으로는 춘파재점(春坡載沾), 벽담쾌일(碧潭快一), 정능(正能), 두신(斗信), 각수(刻手)로는 유필주, 최광로, 유대주가 기재되어 있다. 모두 비석을 건립할 때 참여한 인물들이다.

[현황]

의병승장비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대한불교조계종 보석사이다. 의병승장비 우측에는 1980년에 청동판으로 새긴 영규대사 의선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금산군 지역에 있는 비석 중에는 임진왜란의 무훈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비석이 매우 많다. 고경명조헌의 순의비가 있으며, 영규도 금산군의 보석사에 순의비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지방 수령에 의해 영규의 순의비가 건립되었고, 당대 유명 인사들의 글을 받아서 추모하였다는 사실은 영규의 업적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40년대 일본 경찰에 의해 비석이 훼손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문화유산 관리의 안타까움을 함께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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