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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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 梨峙大捷址 |
이칭/별칭 | 금산 이치대첩 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89[묵산리 산79-3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범 |
건립 시기/일시 | 1592년 7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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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0년 9월 20일![]()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년 - 금산 이치대첩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산 이치대첩지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지정 번호 삭제 |
소재지 | 금산 이치대첩지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89[묵산리 산79-34]![]() |
성격 | 전적지 |
지정 면적 | 99,488㎡ |
소유자 | 금산군 |
관리자 | 금산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있는 임진왜란 전적지.
[개설]
금산군의 이치(梨峙)는 전북특별자치도와 충청남도를 경계 짓는 표고 360m의 대둔산(大芚山) 산줄기 중 하나이다. 산간 사이로 형성된 골짜기를 잇는 고갯길로 사용되었으며, 진산 지역과 운주 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서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이치가 있는 금산군 진산면은 산성이 남아 있어 지역의 군사 거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치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인 것은 바로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에서 비롯하였다.
[변천]
금산 이치대첩지(錦山 梨峙大捷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적지이다. 일본군 2만여 병력은 금산 지역에 진입한 이후 전라도 전주 지역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이치를 선택하였다. 이에 권율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은 이치를 정점으로 방어를 구축하였다. 문헌을 보면, 목책(木柵)과 녹채(鹿砦), 여장 등의 방어물을 시설하였고, 정상부에는 오색기를 세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계곡에 다다른 일본군은 이치를 넘기 위하여 조선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기록을 참고하면, 교전지는 이치 정상부와 이치로 통하는 계곡부라고 추정된다. 또한 방어 시설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중 여장의 경우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위치]
금산 이치대첩지는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79-34번지에 있다. 이치대첩(梨峙大捷)이 전개된 이치는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운주면 기동리를 경계 짓는 고갯길이다. 이치의 양옆은 경사가 거의 70도 가까이 되는 험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치 정상부를 중심으로 노른이골 계곡부는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방향으로 뻗어 가면서 너비가 점점 넓어져 폭넓은 교통로를 형성한다. 따라서 많은 군사들이 곡부 및 그 주변에서 교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10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금산 이치대첩지에 대한 문화 유적 지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당시 전투와 관련한 뚜렷한 유구 및 유물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황]
면적은 9만 9488㎡이며, 2000년 9월 20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금산군이다. 현재, 최대 접전지로 여겨지는 이치의 정상부는 휴게소 건립으로 지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또한 계곡 중심부는 계단식 논과 밭으로 사용되면서 형질 변경이 이루어져, 유구와 관련 시설을 확인할 수 없다. 이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형질 변경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 우수에 의한 계곡부의 침하가 진행될수록 훼손은 점차 가중될 것이다. 조선 시대 이치 전투 이후 최근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유적이 사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전적지에 대한 무관심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의와 평가]
이치대첩에서 1,500여 명의 관군과 의병의 연합군은 1만여 명의 일본군에 맞서 세 번 승리하였다. 임진왜란이 전개되면서 치렀던 많은 전투 중에서 이치대첩이 가지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초기의 전세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포기하게 하였고, 명군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둘째, 이치대첩의 승리는 조선이 전라도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전라도 점령을 포기한 일본군은 금산 지역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권율은 이치대첩의 승리를 행주대첩(幸州大捷) 승리보다 우위에 두었다. 권율은 호남 지역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한 점에 큰 의의를 두었다. 이에 따라 이치대첩 유허비(梨峙大捷 遺墟碑)와 권율장군이치대첩비(權慄將軍梨峙大捷碑) 및 금곡사(金谷祠) 등이 이치대첩의 역사를 보전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