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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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慄 |
영어공식명칭 | Kwon Yul |
이칭/별칭 | 언신,만취당,모악,충장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5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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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권율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권율 도원수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99년![]() |
추모 시기/일시 | 1604년 - 권율 선무공신 1등 영가부원군 추봉 |
추모 시기/일시 | 1841년 - 기공사 건립 및 권율 배향 |
부임|활동지 |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7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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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권율장군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 |
사당|배향지 | 행주서원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행주산성로 127-17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도원수 |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금산군 이치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권씨대동보』에 따르면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6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이며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활동 사항]
1582년 4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승문원 정자,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고, 1591년 의주목사에 부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광주목사로 지내면서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모집하였고, 전라도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권율이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선점한 곳은 금산과 전주의 길목인 대둔산 밑의 이치(梨峙)였다. 이치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험한 산이 있는 좁은 고갯길이었다. 일본군이 이치를 통과하리라 판단한 권율은 고개의 양편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권율은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전투에 임하였는데 황진이 부상을 입자 권율은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았다. 권율은 조카 권승경(權升慶)에게 패배하고 도망치는 일본군을 다시 한 번 기습하게 할 것을 미리 계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치에서 승리한 공로로 권율은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부임하기 전에 다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제수되었다.
이후 행주산성에서도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였으며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9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망하였다. 권율은 스스로 행주대첩보다 이치에서 거둔 승전을 높게 평가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42년 왕명에 따라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하고 배향되었다. 기공사는 1843년 사액을 받았으며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되었다. 이후 행주서원으로 변화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이치대첩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