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66
한자 第二次 錦山 戰鬪
영어공식명칭 The Second Battle of Geum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8월 17일연표보기 - 제2차 금산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2년 8월 18일연표보기 - 제2차 금산 전투 종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조헌

[정의]

1592년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의병장 조헌(趙憲)이 의병을 이끌고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개설]

의병장 조헌이 호남과 호서를 방어하기 위해 금산을 점령하고 있던 왜군과 싸운 전투로 왜군은 이 전투의 여파로 인해 영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6월 초 선조를 구하고 한양을 되찾고자 조직된 3도 근왕군(勤王軍)이 용인에서 패하며 충청, 전라, 경상도의 관군은 소모되었고, 충청도의 수부(首府) 지역인 청주도 왜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조헌(趙憲)은 공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호남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북상하여 왜군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경명은 황간에 주둔해 있던 왜군이 금산을 통해 전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를 막고자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조헌은 왜군에게 뺏긴 청주를 수복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조헌은 방어사 이옥(李沃)의 관군과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의 병력과 함께 8월 1일 청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청주를 탈환한 조헌은 근왕(勤王)하는 데 초점을 맞춰 북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헌은 금산을 점거한 왜군의 기세가 강한 것을 우려한 충청, 전라의 순찰사로부터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도록 요청 받았다. 또한 조헌도 호남과 호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금산을 수복해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헌은 공주에 돌아가 전열을 정비하고 영규의 병력과 합세하여 8월 16일 금산으로 진군하였다.

[경과]

조헌은 8월 18일 전라도순찰사 권율과 함께 금산을 공격할 것을 약속했었는데 권율이 이를 변경하고자 했으나 서신을 미처 받지 못하였다. 8월 17일 조헌은 금산 10리 밖까지 도달하여 권율의 전라도관군을 기다렸으나 군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너무 가까이 진을 치고 있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왜군은 후속의 군사도 없고, 군영이 미비한 점을 간파하고 조헌의 의병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인해 조헌은 죽었으나, 의병들은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왜군은 의병군을 기습 공격했으나 왜군에게 유리한 수성전(守城戰)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한 의병들과 평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많은 왜군이 죽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왜군의 군세(軍勢)가 크게 꺾여 경상도로 철수하게 되었다.

[결과]

제2차 금산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왜군은 금산과 무주 지역에서 후퇴하여 영남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2차 금산 전투로 전라도 공격을 맡은 왜군 제6군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병력은 영남으로 후퇴하여 왜군의 전라도 공략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곡창지대이자 병력의 공급원인 호남 지역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금산군에는 금산 칠백의총이 있고 이외에도 조헌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헌고경명을 배향하고 있는 성곡서원(星谷書院)황풍사(皇風祠), 조헌금산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을 모신 종용사(從容祠), 조헌을 모신 사당인 조헌사당(趙憲祠堂)[표충사(表忠祠)], 조헌이 경치를 보고 감탄했다는 수심대(水心臺)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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