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009
한자 錦山-, 錦山農樂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금산농악의 뿌리와 전통]

농악(農樂)은 타악기로 연주하는 농민들의 음악이다. 악기를 다루는 치배와 뒷놀이를 맡는 잡색으로 구분된다. 금산 지역에서는 흔히 ‘풍물’ 또는 ‘풍장’, ‘풍물굿’ 등으로 불린다. 금산농악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마을에서 연행되었던 마을농악이다. 금산의 마을농악은 크게 걸립농악, 두레농악, 제의농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걸립농악은 마을의 공동 비용을 모으기 위해 풍물패들이 가가호호를 돌아 축원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걷는 것을 말한다. 금산 지역에서는 매년 정월에 풍물패가 행하는 마당밟이[지신밟기]가 그 전형이다. 보통 정월 초삼일에서 대보름 사이에 연행된다. 걸립을 주관하는 풍물패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문굿, 마당굿, 정지굿, 장독굿, 우물굿 등으로 축원해 준다. 걸립을 당한 가정에서는 성의껏 쌀이나 돈을 희사하고 또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한다.

걸립농악은 주변 마을이나 다른 지역으로 그 범주가 확장되기도 한다. 공공의 목적을 띤 다리걸립이나 배걸립이 그 좋은 예이다.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다리는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아우르는 걸립을 통해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다. 금산읍 일대의 큰다리 걸립은 그 전형이다. 큰다리는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하옥리·상옥리를 연결해 주는 가교이다. 매년 장마가 지면 유실되는 탓에 걸립으로 전곡을 모아 다리를 놓았다. 반면에 배걸립은 나루터가 있는 마을에서 배의 건조에 필요한 비용을 목적으로 연행되었다. 금산을 지나는 금강의 물길에는 마을마다 나루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최상류의 방우리나루를 비롯, 수통나루·도파나루·신촌나루·용화나루·닥실나루·천내나루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나루를 왕래하는 나룻배는 5~6년이 지나면 수명이 다하는 까닭에 새로운 배를 건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솜씨가 좋은 상쇠나 장구재비를 불러 걸립패를 조직한다. 이처럼 걸립으로 비용을 모으고 나룻배를 건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배묻이’ 또는 ‘배묻는다’라고 한다. 지난날 금산읍제원면을 잇는 천내나루배걸립굿금산농악의 산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두레농악은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농법으로 등장하는 두레노동의 산물이다. 금산의 두레는 논매기에 국한된다. 초벌·두벌·만물 세 번의 논매기 중에 주로 두벌매기에 두레가 조직되었다. 마을 전체가 동원되는 두레의 공동 노동은 그 상징인 농기와 풍물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두레가 났을 때 치는 농악을 흔히 ‘두레풍장’이라 한다.

한편 제의농악은 공동체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금산의 마을신앙과 궤를 함께한다. 그 종류는 마을의 주산의 산신을 받드는 산신제를 위시하여 동구 밖에서 모시는 탑제·장승제·거리제·목신제 등이 있다. 정숙형으로 치르는 산신제의 경우 대개 풍물을 울리지 않지만, 그 나머지 동제는 으레 흥겨운 풍물이 수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밖에 금산농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물이 있다. 그것은 금산 특유의 연합송계에서 주관하는 ‘초장길닦기’이다.

[상쇠가 선도하는 신명싸움과 풍장싸움]

금산농악의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통은 ‘초장길닦기’이다. 이는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조직된 연합송계에서 주관하는 지역 축제이다. 대규모 연합송계는 수십 마을이 참여하여 한두 개의 면 단위를 아우르는 거대한 조직이다. 금산 지역에서는 진악산 산림을 기반으로 하는 보티재·수리너머재·열두봉재 송계를 비롯, 제원면 신안골 열두송계 등이 있다.

연합송계에서 수행하는 공동 작업의 절정은 해마다 봄철이나 칠석·백중 무렵에 행하는 초장길닦기이다. 이는 송계산을 연결하는 길을 닦고 나무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지난날 초장길은 비단 땔나무 원정뿐 아니라 평소 오일장과 외지를 왕래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이를 관리하는 것은 지역민들의 생활사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었다. 특히 대규모 연합송계의 경우 많은 초군들이 이용하는 까닭에 그 의미가 각별했다.

초장길을 닦는 날은 마을별로 술과 안주를 준비한다. 초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도 이날만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신발도 새로 엮은 짚신을 신었다. 풍물패들은 복식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머리에는 고깔을 썼다. 각 마을의 초군들은 저마다 지게, 삽, 괭이, 낫 등을 지참하고 송계산으로 향했다. 이때 마을마다 큰기[농기]를 앞세우고 장쾌한 길군악에 맞추어 행진한다. 풍물패 뒤에는 초군들이 열을 지어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따라갔다. 이처럼 여러 마을의 초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연중 드문 일이었고, 마을별로 큰기를 펄럭이며 속속 입산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

초장길을 닦는 날은 연합송계에 속한 마을들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그리하여 행사 당일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초군들을 따라 입산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쳤다. 초장길을 닦는 날이 큰 명절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집결이 완료되어 연합송계의 좌장인 대방의 지시가 떨어지면 서로 먼저 가려고 선봉을 다투었고, 마을마다 큰기를 휘두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초군들은 송계산의 고개에 이르러 큰기를 꽂아 놓고 초장길을 닦았고, 풍물패는 신명나는 장단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작업을 마치면 각 마을이 하산하는데, 선봉에 서는 마을이 상쇠가 되어 풍물판을 좌지우지했다. 다른 마을의 초군들과 마주치면 서로 먼저 길을 가려고 시비를 벌이다가 격렬한 농기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처럼 마을 간에 잦은 싸움이 일어나는 까닭에 일제 강점기에는 순사가 배치되어 초군들의 동태를 일일이 감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각 마을의 초군들과 풍물패는 넓은 공터나 시냇가에 모여서 산천이 떠나가도록 풍장을 치고 놀았다. 이는 상쇠싸움인 동시에 풍물싸움으로 어느 동네가 풍물을 더 잘 치는가를 겨루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마을과 자웅을 겨루게 되면 서로 경쟁적으로 풍물을 쳤다. 또한 초장길을 닦는다고 하면 인근에 소문이 파다하여 구경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초군들이 모여 있는 공터에는 술장수·밥장수·과일장수·엿장수 등 온갖 장사치들이 몰려들어 난장을 방불케 했다. 요컨대 초장길을 닦는 전통은 농악의 전승과 발전에 커다란 장을 제공했다. 그것은 두레의 호미씻이를 능가하는 공동체 문화의 총체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전국을 주름잡았던 금산농악]

마을농악의 다양한 전통을 통해 축적된 금산농악은 광복 이후 걸출한 치배들이 다수 배출되어 전국의 풍물판을 좌우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상근·김수동·주기환 등이다. 또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고 류명철 상쇠[남원농악 보유자] 역시 금산에서 풍물을 배워 고향인 남원에서 꽃을 피운 농악인이다. 1940~1960년대 금산농악이 걸어온 길을 간추리면 실로 화려하다. 금산농악은 1946년 8·15 건국 1주년 기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1949년 광복기념농악대회에서 대통령상, 1956년 각도대항농악경연대회에서 준우승, 1959년 남원춘향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우승, 1961년 제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내각수반상을 수상하였다.

금산농악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은 최상근으로, 전국 최고의 장구재비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지녔다고 한다. 최상근의 탁월한 기량은 호남과 충청 지역은 물론 전국의 농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회자된다. 최상근은 1908년[호적상의 생년] 금산과 이웃한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용담면 옥거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풍물판을 전전하다가 동향 출신의 이맹춘으로부터 풍물을 배웠다. 1920~1930년대 금산읍 큰다리 걸립의 상쇠를 맡은 이맹춘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풍물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최상근이 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맹춘의 영향이 크다. 최상근의 재주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당시 금산 최대의 걸립인 천내나루 배걸립굿에 불러 핵심적인 역할을 맡긴 것이다.

최상근의 활약은 금산농악으로 대표되는 전라북도의 농악[금산군은 1963년 충청남도 편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최상근은 금산에 정착하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을 뿐 아니라, 광복 이후 각종 경연 대회를 휩쓸며 고장의 명예를 드높였다. 최상근의 장구 솜씨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 한 토막이 전한다.

때는 1949년, 전라북도 농악 대표를 선발하기 위한 경연 대회가 열렸다. 출전 팀으로 금산·남원·전주·장수·정읍 등에서 각각 한 팀이 나왔다. 당시 금산농악대는 김수동[쇠], 최상근[장구], 주기환[소고] 등이 주축이 되었고, 남원에서는 류한준이 상쇠를 맡았다. 대회 전날 금산농악대와 남원농악대가 한 여관에서 잠을 자는데 저쪽 방에서 들려오는 장구 소리가 기가 막혔다. 그때 남원농악대는 장구를 가장 잘 친다는 노정만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가만히 장구 소리를 듣더니만 이튿날 아침에 소리 없이 보따리를 쌌다. 상쇠인 류한준이 “왜 짐을 싸는가?”라고 물으니, “나는 갈라네, 엇저녁에 저쪽 방에서 굿 치는 소리를 들으니 더 볼 필요가 없네.”라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사연인 즉슨 최상근이 연습하는 소리만 듣고 남원의 장구재비가 기가 죽어 보따리를 싼 것이었다.

생전의 최상근에 대한 기억은 가히 신화적이다. 1990년대 후반 금산·무주·진안 등 수십 마을에서 만난 노인들은 최상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 손으로 장구통을 빙빙 돌려가면서 장구를 치는데, 그 재주가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마당에 모인 청중들 사이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최상근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동을 못 하는 노인조차 손자 등에 엎혀와 구경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금산농악 판굿의 연행 절차와 특징]

금산농악의 판굿은 앞굿과 뒷굿으로 진행된다. 각 굿거리마다 느린 가락으로 시작하여 점점 빠른 장단으로 이어지며 아주 빠른 가락으로 맺는다. 다른 리듬 구조를 가진 장단과 장단이 연결되며 종지는 ‘두마치가락’으로 끝내는 것이 금산농악을 비롯한 좌도농악의 양식적 특징이다. 금산농악 판굿의 연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

앞굿은 내드림굿 → 외마치질굿 → 갖은열두마치 → 세마치·네마치·다섯마치·여섯마치 → 일곱마치 → 여덟마치 → 아홉마치 → 오방진굿 → 품앗이굿 → 호호굿 → 풍류굿 → 영산굿 → 추자받이로 끝을 맺는다. 뒷굿은 춤굿 → 미지기굿 → 삼진굿 → 등지기굿 → 고사리꺾기 → 몰이굿 → 밧삭굿(돌굿) → 도둑잽이굿 → 소리굿 → 파송굿 → 흥억이타령 → 재넘기굿으로 끝을 맺는다.

위와 같이 금산농악 판굿은 앞굿 13개 굿거리, 뒷굿 12개 굿거리를 아울러 25가지로 구성된다. 판굿은 전체적으로 음악이 중심이 되고 개인놀이가 발달한 앞굿, 연희와 놀이가 중심이 되는 뒷굿으로 구별된다. 의식 절차에 쓰이는 가락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잡색과 무동의 춤사위가 발달하여 음악적·무용적·연희적 요소가 풍부하다. 각각의 굿거리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굿거리마다 장단, 진풀이, 연극, 놀이, 제의, 군사, 농사 등의 요소들이 다르게 부각되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한다.

금산농악 판굿은 좌도농악의 굿거리 전개와 유사하다. 앞굿과 뒷굿의 구조는 좌도 권역에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앞굿과 뒷굿의 세부적인 굿거리들은 지역마다 다소 차이를 지닌다. 이러한 판굿의 장단 구성은 마을굿과 걸립농악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으며, 이미 언급한 것처럼 느린 장단으로 시작하여 점점 빨라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내고-달고-맺고-푸는 ‘기승결해(起承結解)’의 완결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양식적 특징은 모든 굿거리마다 본 가락[주제가락]을 제시하고 리듬이 빨라지며 가장 빠른 두마치장단으로 끝마친다는 점이다. 이는 좌도농악의 일반적인 특징이자 한국 음악의 보편적인 속성과 궤를 함께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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