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다, 금산의 송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010
한자 山- 中心-, 錦山- 松契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소나무계’를 뜻하는 송계란 무엇인가?]

송계(松契)는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조직된 계 또는 소나무숲이라는 산림자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결성한 계이다. 그러나 지난 시기 금산의 송계는 단지 소나무의 보호와 이용에 국한되지 않고 지역민들의 생활사와 한층 긴밀하게 맞닿아 있었다. 무엇보다 땔나무와 비료의 공급처가 되었음은 물론,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조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울러 임목(林木)의 생산과 유실수의 방매, 산전(山田)·화전(火田)의 개간 등 송계가 조직된 마을은 일정한 금제(禁制)하에 산림의 이용을 극대화함으로써 동중재원(洞中財源)을 확보하고 각종 긴급사에 대응하였다. 때문에 산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지역에서 송계산은 가히 목숨과 관계되는 것으로 회자되곤 하였다.

송계는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다. 지역에 따라 금송계(禁松契)·솔계·순산계(巡山契)·금양계(禁養契)·송리계(松梨契)·삼림계(森林契)·애림계(愛林契)·식림계(殖林契)·산림계(山林契) 등으로 불린다. 이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은 ‘송계’이다. 금산에서는 그 조직 범위에 따라 독송계(獨松契)·양동송계(兩洞松契)·삼동송계(三洞松契)·사동송계(四洞松契)·오동송계(五洞松契)·열두송계 등으로 호칭되기도 한다.

‘송계’란 명칭은 지난날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즉 소나무는 각종 건축과 농기구, 생활도구를 제작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관곽(棺槨), 상자, 옷장, 뒤주, 찬장, 도마, 말, 되, 벼룻집, 소반, 주걱, 절구 등을 비롯, 쟁기, 풍구, 가래, 멍에, 가마니틀, 물레, 벌통, 나막신, 사다리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를 다 열거하기 어렵다. 국가에서도 궁궐이나 관아를 짓고 수리할 때, 병선과 선박의 건조에 필요한 선재(船材)가 모두 소나무였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국가와 왕실 수요의 목재를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하여 해안이나 특정 지역의 산림을 금산(禁山)·봉산(封山)·송전(松田)으로 지정하고, 송금사목(松禁事目)·송계절목(松契節目) 등을 제정하여 소나무의 수호금양(守護禁養)에 노력을 기울인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우리나라에는 좋은 목재가 없어서 오직 소나무만을 사용한다. 산림 정책은 오직 송금(松禁) 한 가지 조목만 있을 뿐 전나무·잣나무·단풍나무·비자나무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다. 기실 조선 시대의 산림 시책은 송정(松政)만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나무를 중요시하였으니, 결국 ‘송계’란 명칭은 소나무의 다양한 활용에 기인한 것이다.

[조선 후기 송계가 등장하는 까닭]

조선 시대의 산림과 수리(水利)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다 함께 이익을 나누는 땅[一國人民公利地 與民公利地]’이라는 이념으로 표방되었다. 여기에서 공리(公利)란 한 나라의 백성들이 일정한 금제하에 능력과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토지 이용 관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산림과 수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한 나라 백성들의 공용지(公用地)라 할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는 상속되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이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공리지는 사사롭게 점유하는 것을 금한다[公利地勿令私占]’는 원칙에 따라 산림의 사적 소유는 엄격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왕실과 권세가들에 의한 공리지 분할과 사점(私占)이 공공연히 진행되면서 이제까지 견지되어 온 산림 정책의 기조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전례 없을 정도로 권세가들의 사점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권세를 쥔 자들은 누구든지 주인 없는 임야를 독점적으로 선점하여 타인의 이용을 배제하고 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면 사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력과 물자가 여유 있는 자는 산지기와 묘지기를 두고 수호금양을 지속함으로써 사적 소유의 사양산(私養山)을 소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이 관으로부터 입안(立案)을 받은 산림은 인근의 주민들조차 그 위세에 겁을 먹고 풀도 채취하지 못할 정도로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산림의 면적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19세기에는 산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산송(山訟)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였다. 그뿐 아니라 선산 수호를 명목으로 입산을 제한받게 된 초군들이 19세기 농민항쟁에 대거 참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산림 이용의 급속한 변화로 힘없는 백성들도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산림의 문제를 촌락 또는 지역 사회 내부에서 슬기롭게 극복한 민간의 자치 조직이 바로 송계였다. 즉 송계는 관으로부터 산림의 이용을 인증받거나 공동으로 매입하여 배타적인 사용권을 확보함으로써 땔나무와 비료의 안정적인 수급을 도모하는 유력한 방편이 되었다. 국가에서도 산림의 황폐화를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인 관리 방안으로 송계가 적극 권장되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타고 촌락 사회 내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마을 소유의 송계산을 갖는다는 것은 비단 땔나무와 비료뿐 아니라 산전(山田)의 개간과 분묘, 목재 등 생활 전반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골골마다 조직되었던 금산의 송계]

금산 지역의 송계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일반적인 송계의 성립 시기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금산 지역이 산간 분지에 입지하는 지리적인 특성상 공리지의 침탈로 인한 산림의 문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날 금산 지역의 송계는 10개 읍면, 249개 리, 400여 자연 마을에서 총 156개소로 확인되었다. 이 수치는 156개 마을에 송계가 조직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한 마을 단위로 조직된 독송계(獨松契)와 2개 마을 이상~수십 마을이 참여한 연합송계(聯合松契)를 아우른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대부분의 동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송계에 직간접으로 가입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다. 실제 송계와 무관했던 곳은 금산군 전체를 통틀어서 20여 마을로 추산되며, 산주(山主)와 계약을 맺는 형태로 화목산지를 확보했던 사례를 포함하면 송계에 참여한 비율은 95%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 마을이 2~3개의 송계에 가입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고, 심지어 4~6개의 송계에 중첩되게 가입한 사례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금산 지역에서는 19세기를 전후하여 기존의 연고권이 있는 산림을 송계산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금산의 송계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10여 마을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의 연합송계이다. 이들 송계는 초군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인 연합송계는 제원면의 화목산지로 기능했던 신안골송계를 비롯, 진악산의 산림을 매개로 하는 수리너머재송계, 보티재송계, 열두봉재송계가 있다. 또한 금성면을 대표하는 월봉재송계, 복수면·추부면의 초군들이 이용했던 마당재송계 및 군북면 두루골송계가 여기에 속한다.

연합송계에서는 초군들의 지게에 불도장[火印]을 찍어 주어 송계원이 아닌 자의 입산을 불허하는 전통이 내려왔다. 화인의 관행이 대규모의 연합송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초군들의 입산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이다. 즉 모내기를 앞두고 퇴비 확보를 위해 내려지는 풀령이나, 땔나무철이 되면 수많은 초군들이 송계산을 드나들었기에 계원의 자격 여부를 식별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외지인의 입산과 남벌을 막고, 송계산을 효율적으로 수호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바로 화인이었다. 따라서 화인은 곧 송계산의 입산을 공식으로 허가한다는 일종의 출입증이다.

금산 지역 연합송계의 역원은 우두머리로 대방(大方)·앉은대방·솔대방·계장(契長)이 있고, 그 휘하에 부계장(副契長)·송계유사(松契有司)·초군대방(樵軍大方)·총무(總務)·재무(財務)·순산원(巡山員)·감금인(監禁人) 등을 두고 조직을 운영하였다. 그 수장인 대방·앉은대방·솔대방이란 호칭은 10개 동리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의 연합송계에서 주로 나타난다. 예컨대 진악산의 산림을 송계산으로 하는 수리너머재송계, 보티재송계, 열두봉재송계, 월봉재송계 등에서는 한결같이 송계의 책임자를 대방 또는 앉은대방이라 불렀다. 대방은 초군을 통솔하는 인물로서 학덕을 두루 겸비한 지역의 유력자 중에서 추대되었다. 구성원들로부터 상당한 권위와 신망을 인정받았다. 때문에 대방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나 다름이 없었고 유사시 그의 지시 사항은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였다.

[초군들의 축제로 승화된 초장길닦기]

지난날 송계의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공동 작업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해마다 울력을 내어 송계산의 초장길을 닦는 관행이다. 초장길은 화목 원정뿐만 아니라 평소 오일장과 외지를 왕래하는 데 필수적인 지름길을 겸하기 마련이다. 신안골 열두송계의 경우 백중 전에 날을 잡아 초장길을 닦고 나무다리를 놓는 관행이 내려왔다. 이는 해마다 장마로 인해 패이거나 유실된 길을 보수하고 시냇물에 다리를 놓아 시초길을 트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하여 언제 길을 닦는다는 통문이 돌면 마을별로 울력을 내고, 집집마다 쌀과 보리를 갹출하여 비용을 충당하였다.

초장길을 닦는 날, 각 마을의 초군들은 아침 일찍 풍물패를 대동하고 집결 장소로 속속 모여들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농기[큰기]를 든 힘센 수총각이 선봉에 서고, 그 뒤에는 상쇠, 징, 장구, 북, 소고 등이 장쾌한 길군악을 울리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리고 맨 뒤에는 작업 도구를 지참한 초군들이 흥겹게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열을 지어 갔다. 이렇게 마을마다 농기를 펄럭이며 입산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으니 이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줄을 이었다.

각 마을은 선봉에 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풍물패가 집결하면 한바탕 합굿을 치며 놀다가 송계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때 어느 마을이 앞장설 것인지를 놓고 아침부터 다툼이 벌어졌다. 초장길 행사의 대미는 지정된 장소에 섶다리를 놓는 일이다. 골이 깊은 광활한 산림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마다 다리를 설치해야 초장길이 이어진다. 신안골송계의 경우 ‘여덟다리’ 또는 ‘열두다리’로 불리는 가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각의 다리는 가설을 책임진 마을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가령 신안골 초입에 위치한 ‘대산다리’[대산리]를 위시하여, ‘북촌다리’[제원리]-‘큰동네다리’[제원리]-‘명암다리’[명암리]-‘새동네다리’[제원리]-‘닥실다리’[저곡리]-‘장선이다리’[천내리]-‘신안다리’[신안리]가 그것이다. 여기에 ‘창평다리’ 등 소소한 다리를 합치면 열두 개의 다리가 되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전에 신안골송계에 가입된 마을이 농기를 들고 겨루기를 했는데, 대산리가 1등을 차지하여 신안골의 관문인 첫째 다리를 맡았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각 마을이 가교를 설치하면 약 8㎞[20여 리]가 넘는 긴 초장길이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신안골송계의 초장길 행사는 제원면 전체의 축제였다. 행사 당일에는 면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초군들을 따라 신안골까지 입산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쳤다. 작업을 마치면 각 마을이 길군악을 울리며 하산하는데, 선봉에 서는 마을이 상쇠가 되어 풍물판을 좌지우지했으므로 다른 마을 초군들과 마주치면 서로 먼저 길을 가려고 시비를 벌이다가 격렬한 농기싸움으로 비화되곤 하였다. 이처럼 마을 간의 잦은 싸움이 일어나는 까닭에 일제 강점기에는 순사가 배치되어 초군들의 동태를 일일이 감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공터에 집결한 각 마을의 풍물패들은 면내가 떠나가도록 풍장을 치고 놀았다. 이는 상쇠싸움인 동시에 풍장싸움으로 어느 동네가 풍물을 더 잘 치는가를 겨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마을의 풍물패가 마주치면 서로 잘하려고 경쟁적으로 풍물을 쳤고, 그렇게 함께 어우러져 놀다가 밤이 이슥해진 뒤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사실 그동안 풍물싸움·농기싸움·기세배 등 풍물굿이 지닌 역동성은 두레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금산 지역의 송계두레와 유사한 풍물 조직이 편성되었을 뿐 아니라 호미씻이를 압도하는 초군들의 자발적인 축제로 전승되었다. 실제 금산 지역에서는 두레의 호미씻이보다 송계의 초장길을 닦는 관행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는 산간 분지에 입지한 금산의 특성상 밭농사가 주축이었음을 상기하면 두레보다 송계의 영향력이 컸음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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