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011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물과 뭍을 이어주는 나루와 나룻배]

금강의 발원지는 전북특별자치도 장수의 신무산(神舞山)[897m] 기슭이다. 이곳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길은 진안고원을 지나 감입곡류(嵌入曲流)하여 무주의 남대천을 만나 강물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금산군 부리면으로 접어들어 적벽강(赤壁江)이 되고, 제원면 용화리를 지나며 용강(龍江)이라 불린다. 그 하류에서 봉황천을 받아들인 물길은 금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천내강(川內江)으로 변신한다. 이처럼 금산의 동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금강의 본류는 각 마을을 지나면서 나루를 탄생시켰다.

나루는 강과 하천을 건너는 가교이다. 나루와 나루 사이를 오가며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실어 나르는 작은 배가 나룻배이다. 나루의 기원은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의 고도 웅진(熊津), 즉 곰과 나무꾼의 애틋한 전설이 서린 곰나루[고마나루]는 나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백마강의 옛 지명인 사비(泗沘) 또는 사비하(泗沘河)·사자하(泗泚河)는 고려 이후 조선 초에 고성진(古省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소산 서쪽에서 사비성의 관문 역할을 하던 구드래나루를 지칭한다.

이처럼 나루는 고대 사회 이래 물길을 트는 교통 수단이자 인적·물적 교류의 거점이다. 따라서 전통 시대의 나루는 비단 물과 뭍을 연결할 뿐 아니라 장시와 장시를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매개하는 구심점으로 기능하였다. 수운(水運)을 이용한 금강의 나루는 조선 후기 장시의 발달을 촉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금강의 나루는 나룻배를 운영하는 주체에 따라 여러 방식이 있다. 금산을 비롯한 상류 지역은 마을에서 배를 건조하여 사공을 두고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특히 강촌의 주민들은 장시를 왕래하거나 강 건너 전답에서 농사를 짓는 등 생활상의 편의를 위해 나룻배 확보가 긴요하였다. 소규모의 나루는 마을 자체적으로 건조 비용을 충당하지만,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나루는 이웃 마을과 지역 사회의 협조를 얻어 나룻배를 마련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내려왔다. 이름하여 ‘배걸립굿’ 또는 ‘배묻이굿’이다.

[천내나루와 금강 상류의 배걸립굿]

지난날 금강 상류에는 마을마다 나루와 섶다리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무주의 서면나루와 앞섬나루를 비롯, 금산의 수통나루·도파나루·신촌나루·용화나루·닥실나루·천내나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금산의 지역민들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나루는 제원의 천내나루이다.

금산의 천내나루금강 상류의 나루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지리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은 제원역(濟原驛)의 역로에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원역은 1895년 폐지될 때까지 무주 소천역, 용담 달계역, 진안 단령역, 고산 옥포역과 함께 6개의 원(院)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천내나루는 조선 시대 금산-영동 방면과 금산-무주-용담-진안 등을 연결하는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영동과 금산을 잇는 영금선 개통으로 천내나루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에는 자동차·행인·우마를 막론하고 모두 나루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넜다. 따라서 금산장이 열리는 날은 영동군 학산·양산·옥천과 전북특별자치도 무주·진안 등에서 올라오는 장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제원들에 있는 논밭에 농사를 지으려면 나루를 이용해야 하였다.

천내나루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서 강을 건너 제원역을 거쳐 금산에 이르는 길목이다. 지금의 제원대교 바로 위쪽에 나루가 있었다. 나룻배는 선출직 사공이 전담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나루터 관리는 천내리에서 맡아 매년 장마철에 유실되면 마을 사람들이 울력을 내어 몇 번이고 복구하였다.

나룻배 건조에 필요한 재원은 배걸립굿으로 충당하였다. 나루를 왕래하는 나룻배는 5~6년이 지나면 수명이 다하는 까닭에 새로운 배를 건조해야 한다. 그 시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정월이다. 이를 주관하는 천내리에서는 ‘큰걸립’이라고 불렀으며, 소문난 상쇠나 장구재비를 초청하여 걸립단을 구성하였다. 이처럼 걸립으로 비용을 모으고 나룻배를 건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배묻이’ 또는 ‘배묻는다’고 한다.

걸립패의 우두머리인 총대는 화주(化主)라고 한다. 마을에서 배걸립의 경험이 풍부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사리가 분명하고 언변에 능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대해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주민들은 “말 잘하고, 인물 좋고, 글 잘하는 ‘삼천 냥 그릇’이라야 화주를 맡을 수 있었다.”라고 증언한다. 그만큼 화주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화주는 구체적인 일정을 짜고 걸립패의 구성과 일정을 총괄한다. 무엇보다도 관청의 승인을 얻어내고 천내리를 벗어나서 외지로 나갔을 때 걸립의 허락을 얻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화주는 2인으로 구성되는데, 한 사람은 걸립단을 진두지휘하여 현지에서 걸립을 진행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걸립이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마을로 가서 걸립을 트는 일을 맡았다. 화주의 지시나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때로는 풍물을 치는 일에도 관여하여 가락이 시원치 않거나 호흡이 맞지 않는 치배는 혼쭐이 났다.

걸립패는 마을에서 솜씨 있는 사람으로 꾸리되 외부에서 내로라하는 치배들을 불러들였다. 아를 위해 소문난 풍물꾼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며 실력을 겨루었다. 이 자리에서 풍물을 치는 것을 보고 화주가 좌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적으로 걸립패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치배는 쇠 3, 징, 장구 3, 소고[벅구], 새납 등을 짜고, 잡색은 포수, 양반, 무동[꽃나비·중나비]으로 편성되었다.

최초의 배걸립굿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서 시작된다. 큰걸립이 시작되는 날 걸립패와 화주는 마을의 수호신인 용석(龍石)과 호석(虎石)을 돌며 치성을 드린 다음 가까운 지역부터 걸립에 들어간다. 즉 천내리 주변의 마을을 먼저 돌고 점차 그 범위를 확대하는데, 금산 관내에서는 제원면에 속한 대부분의 마을과 금산읍 일원, 그리고 금성면·군북면의 일부가 배걸립 대상에 포함되었다. 금산을 벗어나면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와 생활권이 인접한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학산면, 옥천군 이원면·옥천읍,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이 배걸립굿의 대상이다.

[배걸립굿의 전개 양상, 마른걸립과 진걸립]

배걸립굿의 방식은 ‘마른걸립’과 ‘진걸립’이 있다. 화주는 걸립을 떠나기 전에 일정을 짜고 대상 마을 및 예상되는 비용을 책정해 둔다. 그런 다음 걸립이 진행되는 동안 혹은 며칠 전에 미리 이웃 마을로 가서 의사를 타진한다. 이를 ‘선통(先通) 띄운다’고 한다.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고 걸립패가 들이닥치는 것은 상대 마을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여져 자칫 마을 간의 다툼으로 비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화주는 해당 마을로 가서 이장이나 권세가에게 배를 건조하기 위해 걸립이 났음을 설명하고 이에 응할 것인지의 여부, 걸립에 응한다면 진걸립을 할 것인지 마른걸립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마른걸립이란 걸립패가 직접 현지에 가지 않고 선통을 받은 마을에서 일정액을 희사하는 것이다. 걸립패가 마을로 들어오게 되면 숙식을 제공해야 한다. 게다가 일부 반촌은 풍물을 꺼려하여 걸립패를 들이지 않는 마을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선통을 띄우러 간 화주에게 얼마를 주기로 미리 약조하고 완곡하게 걸립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걸립은 걸립패가 현지를 직접 방문하여 가가호호를 돌며 걸립하는 것을 말한다. 진걸립이 떨어지면 걸립패는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길군악을 울리며 걸립에 응한 마을로 간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 이르면 당산이나 서낭당에 고사[인사]를 올린 다음 걸립이 났다는 신호로 한바탕 풍장을 치고 논다. 그러면 마을에서 그 소리를 듣고 마중을 나와 걸립패를 맞이한다. 마을로 안내된 걸립패는 이장이나 유력자의 집부터 차례로 걸립에 들어간다.

걸립굿은 영기수가 대문 양쪽에 기를 꽂아 놓으면 걸립패가 그 집으로 들어가 자진마치로 마당을 돌며 갖가지 재주를 선보인다. 걸립패는 상쇠가 이끄는 대로 풍년굿·밧삭굿·각진·소리굿 등으로 판굿을 펼친다. 그리고 마당 한복판에 전원이 빙 둘러서서 상쇠의 신호에 따라 쇠, 장구, 벅구 등이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 개인놀이를 선보인다. 이를 ‘추자받는다’고 한다. 이때 호명된 치배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재주와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며 마당판을 압도한다.

추자받기의 압권은 최상근의 장구놀이와 주기환의 벅구놀음이었다. 최상근은 한 손으로 장구통을 빙빙 돌려가면서 치는데 그 재주가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마당에 모인 청중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최상근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동을 못 하는 노인조차 손자 등에 엎혀 와서 구경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뿐만 아니라 꼬리북수 주기환은 ‘자반뒤집기’, ‘나무제끼기’[현지 용어임], ‘연풍대’ 등 각종 땅재주와 묘기를 연출하여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잡색과 무동의 해학적인 놀이와 재담이 어우러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마당밟이를 마치면 집주인이 술을 내어 걸립패를 대접한다. 이어서 걸립패는 부엌-장독-우물을 돌며 고사덕담으로 정지굿-터주굿[장독굿]-샘굿을 쳐준다. 그러면 그때마다 집주인은 마루, 부엌, 장독에 상을 받쳐 놓고 성의껏 전곡을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포수는 쌀 한 사발이라도 더 얻어내려고 말박[매우 큰 바가지]을 찾아서 집주인에게 가져다주고 온갖 능청을 떨면서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기실 포수의 재담이 좋아야 많은 전곡이 나오기 마련이다.

금강 배걸립굿은 나루를 매개로 전승되어 온 공동체 문화의 진수이다. 광복 이후까지 지속된 천내나루 배걸립굿은 그 전형으로 ‘금산농악’의 산실로 기능하였다. 특히 배걸립굿을 이끈 최상근은 광복 이후 최고의 장구재비라는 명성을 얻으며 20세기 농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의 탁월한 솜씨는 1960년대 최초의 포장걸립을 가능케 하였으며, 금산은 물론 무주·진안·장수·남원 등 호남과 충청도 지역의 농악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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