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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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女性- 破格的 祈雨祭, 錦山籠-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기우제의 역사와 금산의 기우풍속]
기우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좁은 의미로는 제사 형식의 각종 기우의례(祈雨儀禮)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모든 주술적 행위를 포괄한다. 금산 지역에서는 흔히 ‘무제’, ‘무지’ 등으로 불리는데, 이는 ‘물[水]과 제(祭)’가 결합된 말이다. 즉 물을 비는 제사란 의미의 ‘물제’에서 ‘ㄹ’이 탈락되어 무제가 되고, 제의 방언인 ‘지’가 붙여져 ‘무지’로 불리는 것이다.
기우제의 역사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고대 사회 이래 가뭄의 해결은 곧 통치자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그 선정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덕목이었다. 한발(旱魃)이 지속되는 것은 왕 또는 지방관이 부덕하여 민생을 돌보지 못한 책임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가뭄을 만나면 목민관은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깨끗이 씻고 정성을 들여 신이 비를 내려줄 것을 묵묵히 빌어야 할 것이다.”라고 상기시킨 바 있다.
물은 농사의 근간이다. 따라서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시대에 가뭄이라는 천재지변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한 기우풍속을 낳았다. 주제집단의 측면에서 볼 때 금산의 기우제는 대체로 여성이 의례의 중심에 서 있다. 그 대표적인 기우제가 금강 상류에서 전승되는 ‘금산농바우끄시기’이다. 이 밖에 수신인 용을 위협하거나 용의 거처를 더럽혀서 운우(雲雨)를 기원하는 ‘대늪치기’, ‘청징연 기우제’ 등이 있다.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 금강 변에는 반닫이 농(籠)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바위가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이름하여 ‘농바우’이다. 이 바위는 예부터 매우 영험한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치성을 받았다. 아들을 두지 못한 여인들은 목욕재계하고 찾아와서 후사를 빌었는가 하면, 한발이 닥쳤을 때 비를 기원하는 신령스러운 바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지개벽을 도모하는 금산농바우끄시기]
금산농바우끄시기는 농바우를 끌어당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통해 비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여기에서 ‘끄시기’는 ‘끌기’의 방언으로 끌어내린다는 뜻이다. 이 바위에는 용력이 출중한 장수의 갑옷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그 바위가 땅으로 굴러떨어지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속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오래도록 가뭄이 지속되면 부녀자들은 동아줄을 꼬아 농바위에 걸고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끌어내리는 시늉을 한다. 그 장면을 본 하늘에서 깜짝 놀라 농바위가 굴러떨어지기 전에 비를 준다고 한다. 이렇게 한바탕 농바우를 끄시고 나면 효험이 있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속설이 전한다.
금산농바우끄시기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역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농바우 주변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따르면 수백 년 전부터 날이 가물면 부녀자들이 농바우에 비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에 두 명의 부인을 거느린 장수[혹은 임금]가 살고 있었다. 장수의 아내들은 서로 먼저 남편을 차지하려고 늘 투기를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발발하여 장수는 아내를 남겨 둔 채 싸움터로 나가 공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벗어 놓은 장수의 갑옷을 두고 또다시 두 명의 아내가 싸우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장수는 갑옷을 빼앗아 바위로 된 단단한 농 안에 넣고 다시는 꺼내 볼 수 없도록 농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 장수의 갑옷이 보관된 농이 지금의 농바우라고 한다.
농바우에는 아기장수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에 농바우 인근에 마음씨 착한 부부가 살았다. 늙도록 후사가 없어 근심하던 부부는 뒤늦게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빨이 나고 겨드랑이에 날개처럼 비늘이 달려 있었다. 아이는 세 살이 되자 무거운 물건을 몰래 옮기고 병정놀이를 하는 등 신이한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노부부는 장차 화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식을 질식시켜 죽였다. 그러자 멀쩡하던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더니 백마 한 마리가 슬피 울면서 농바우 곁에 와서 죽었다. 백마는 장차 아기가 군사를 지휘할 때 탈 말이었고, 농바우 속에는 장수가 되면 입을 갑옷이 들어 있었다.
아기장수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이웃 마을에 사는 욕심 많은 석수장이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석수장이는 갑옷을 꺼내 입을 요량으로 산 정상에 있는 농바우에 올라가 징으로 쪼기 시작했다. 일이 얼추 마무리될 즈음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남의 눈에 띌세라 부랴부랴 농바우로 향하던 석수장이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산꼭대기에 있어야 할 농바우가 굴러떨어져 뒤집힌 채로 산중턱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 후로 주변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모두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길을 지나던 스님이 비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농바우를 흔들면 진노한 하늘에서 비를 내려 준다는 것이었다. 스님의 말을 듣고 부녀자들이 몰려가서 농바우를 끄시니 과연 응함이 있어 멍석 같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농바우를 끌어내리며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농바우를 끌어내려야 비가 온다]
가뭄의 징조가 엿보이면 부녀자들은 농바우를 끄시기 전에 집집마다 왼새끼를 꼬아 듬성듬성 청솔가지를 꽂아 대문에 건다. 아울러 강변으로 나아가 빈 병에 물을 담아 솔가지로 입구를 막고 대문 앞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그러면 병에 들어 있는 물이 솔잎을 타고 흘러나와 뚝뚝 떨어진다. 즉 강우의 장면을 가상으로 연출함으로써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는 모방주술이다.
이와 같이 정성을 드려도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농바우를 끄셔야 한다는 분위기가 점점 확산된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저놈의 농바우를 깨부셔야지”, “농바우를 끄셔야 비가 내릴 몬양여”라고 이구동성으로 의견이 모인다. 마침내 금산농바우끄시기가 결정되어 동아줄을 틀어 농바우에 맨다. 부인네들은 목욕재계하고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제물과 음식, 술 그리고 날궂이를 할 때 사용할 챙이[키]와 바가지를 가지고 농바우로 향한다. 다만 달거리를 하거나 부정이 있는 여인은 농바우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농바우에 도착한 여인들은 바위 밑에 제물을 차리고 기우제를 지낸다. 이를 ‘무지[제] 잡숫는다’고 한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잔을 올린 뒤 고사덕담으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소지를 사른다. 무제를 마치면 “농바우 끄시세!”라는 신호와 함께 동아줄을 당긴다. 이때 입심 좋은 여인[혹은 남자 소리꾼]이 농바우 날망에 올라앉아 구성지게 선소리를 매기면, 맞은편 언덕에서 줄을 잡고 있던 아낙네들이 ‘어기어차’ 또는 ‘우엿차’ 하고 소리를 받으며 농바우를 끄신다. 어느 한쪽이 끌면 다른 쪽은 쉬어 가며 서로 엇갈리는 방식으로 줄을 당긴다. 또한 뜨거운 햇볕 아래 장시간 농바우를 끄셔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면 그늘 아래서 밥도 해 먹고 쉬기도 했다.
또 신기(神氣) 있는 할머니[혹은 단골내]가 점을 쳐서 언제쯤 비가 내릴 것인지를 예언하기도 한다. 무당이 공수를 내리듯이 비올 시기와 강우량을 예언하는 것이다. 점괘가 잘 나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점을 쳐서 언제 비가 내릴 것인지를 알아본다. 이때 할머니의 입에서 “날궂이를 하고 나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든가 또는 “집으로 돌아갈 때 비를 맞고 갈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오면, 아낙네들은 흡족히 생각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날궂이를 하러 여울로 간다.
[여자들이 알몸으로 날궂이를 하는 까닭]
강변으로 내려온 부녀자들은 돌을 날라다가 둑을 쌓고 여울물이 잘 흐르지 않도록 막는다. 이를 ‘개[洑] 막는다’고 한다. 곧 가뭄이 심해 강물조차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니 여울을 막아야만 물속에서 날궂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돌을 날라다 개를 막은 뒤, “우리 동네 처녀들이 날이 가물어서 빨래를 못 해 시집을 못 가니 오늘내루 비 좀 내려 주시오.”라고 간곡히 호소한다. 여자들이 날궂이를 할 때는 벌거벗거나 고쟁이만 걸치고 물속에 들어가서 갯여울이 떠나가도록 물장난을 치고 춤을 추며 논다. 혹은 고쟁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강물에 속옷을 빨거나 오줌을 누며 온갖 괴상망측한 행동을 벌인다. 강물을 더럽혀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 준다고 믿는 까닭이다.
날궂이는 단순한 물장난이 아니라 비를 염원하는 유감주술이다. 아낙네들은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머리에 물을 부으면서 “비 맞아라, 비요~ 비요~, 이 비 맞고 목깡이나 하거라~”라고 실제 소낙비를 맞는 흉내를 낸다. 또한 챙이에 물을 담아 마을을 향해 까부르며 비가 내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와 같이 농바우를 끄시고 날궂이를 한 뒤에는 신통하게도 비가 오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어느 해는 농바우를 끄시는데 진악산 줄기에서 먹구름이 일어나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고, 또 날궂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서 장대비를 맞고 돌아간 일도 있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 농바우를 끄시다가 비가 내리면 갓바우 밑에서 비를 피했다고 한다.
지난날 금산농바우끄시기는 부리면과 이웃한 제원면의 일대의 수십 개 마을이 참여하는 민간 기우제로 전승되었다. 가뭄이 극심한 해에는 농바우가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금산읍 등 외부에서도 부녀자들이 찾아와 농바우를 당겼다고 한다. 그러나 가뭄의 징조가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금산농바우끄시기를 모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목숨이 달린 극심한 한발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금산농바우끄시기에 참여한 주민들은 일생 농바우를 끄셔본 것은 4~5회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을 꾀해 비를 기원하는 행위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즉 일상적인 가뭄이 닥쳤을 때는 마을 단위로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보통이고, 그 뒤에도 한발이 해소될 기미가 없으면 비로소 금산농바우끄시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한편 농바우가 있는 시루봉 정상에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구전에는 그 밑에 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곳에 묘를 쓰면 그 집안은 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정작 주변 마을은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망친다는 속설이 전한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까지도 여자들이 농바우를 끄시고 날궂이를 하는 사이에, 남자들은 시루봉에 올라가서 몰래 묘를 쓴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매장의 흔적이 있으면 여지없이 파헤쳤다고 한다. 예전에 금산군 부리면 현내리에 사는 길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몰래 묘를 쓴 일이 있는데, 농바우를 끄시는 날 주민들이 몰려가서 묘를 파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장을 한 일도 있다고 한다.
[금산농바우끄시기 의미와 기우주술의 특징]
「농바우끄시기이야기」는 장수와 갑옷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래전설에서 석수장이가 갑옷을 꺼내기 위해 농바우를 건드린 행위는 곧 천지개벽이라는 성역의 금기를 깨뜨리는 도전 행위이다. 왜냐하면 농바우가 열리는 것은 곧 아기장수의 출정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그것은 하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상을 구할 아기장수는 이미 죽임을 당했고, 갑옷을 꺼내려던 석수장이의 꿈도 좌절되었다. 단지 돌아온 것이 있다면 농바우를 건드린 대가로 극심한 가뭄이라는 하늘의 재앙을 초래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승의 해결책은 놀랍게도 농바우를 흔들어서 하늘을 노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승의 해결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비록 아기장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농바우에 갑옷이 보관되어 있는 한, 다시 말해 농바우가 산 중턱에 머물러 있는 한 천지개벽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노승이 농바우를 흔들라는 비법을 알려준 것은 곧 천지개벽을 도모해서 비를 기원하라는 의미이다. 즉 농바우가 굴러내려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하늘에서 비를 내려줄 것이라는 합리적인 사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바우는 가뭄을 해갈시켜 줄 상징인 동시에 민초들이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희망의 불씨였던 셈이다.
농바우에 깃든 전설은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켜 금산농바우끄시기가 널리 확산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나의 전설은 또 다른 전설을 낳는다. 「아기장수전설」과 같은 혁세사상이 결합되면서 수십 개의 마을이 참여하는 금강 변 최대의 기우제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금산농바우끄시기가 여성 중심의 기우제임에도 광범위한 전승력을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기우풍속 중에서도 분명 전례가 드문 민속이다. 더욱이 농바우에 깃든 유래전설의 상징성, 벌거벗은 아낙네들에 의한 날궂이와 동아줄을 바위에 걸고 끌어내리는 주술적 행위, 곧 천지개벽의 관념을 역이용하여 비를 기원하는 역동적인 놀이와 의식은 다른 지역의 기우제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요소이다.
금산농바우끄시기는 단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리 시설의 확충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기우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금산에서는 1992년 한발이 닥쳤을 때 주변의 부녀자들이 찾아와서 농바우를 끄신 일이 있다. 또 1993년 농바우끄시기보존회가 결성되어 매년 금산인삼축제와 금강민속축제에서 금산농바우끄시기가 재현되었으며, 2000년 9월 20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현 충청남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