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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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瑜·全琬·全球兄弟 |
이칭/별칭 | 효자전공형제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6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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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시기/일시 | 1651년![]() |
출생 시기/일시 | 1655년![]() |
몰년 시기/일시 | 1694년![]() |
몰년 시기/일시 | 1709년![]() |
몰년 시기/일시 | 1718년![]() |
사당|배향지 | 형수당 -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내부길 30-6[내부리 산13]![]()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천안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거주한 조선 후기 효자 형제.
[개설]
전유·전완·전구형제의 가문은 조부 전식 대부터 효성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전식이 부모의 기일에 고기를 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꿩이 말 머리에 날아들어서 그 꿩을 잡아서 제사를 지냈는데 세간에서는 자식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전유·전완·전구형제의 행장을 쓴 김원행(金元行)은 본래 사람이 다른데 하나의 행장에 같이 기록함은 옛날의 법도가 아니지만 삼형제와 같은 사람은 단지 한 몸과 마찬가지이므로 한 편의 글에 기술되어도 누가 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가계]
전유 삼형제의 본관은 천안이다. 고려 초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좌복야에 추증되고 영주군(寧州君)에 봉해진 전낙(全樂)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전효증(全孝曾), 조부는 전식(全軾)이며 아버지는 전예달(全禮達)로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사랑 김사전(金士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에게 처음 학문을 배웠으나 곧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삼형제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향리(鄕里)에 거주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를 제대로 봉양할 수 없었으나 형제들은 서로 권면하여 마음을 다해 봉양하였다. 남의 집에 갔다가 술과 고기를 주는 경우가 있으면 그때마다 차마 먹지 못하고 옷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바쳤다. 극심한 흉년에는 더욱 수고를 아끼지 않고 분주하게 양식을 구해서 부모에게 음식을 극진히 장만하였다. 부모가 일찍이 자라를 좋아하여 삼형제의 막내인 전구는 손수 그물을 짜서 직접 등에 지고 다니며 곳곳마다 그물질하여 용담과 무주까지 두루 다녔다. 강가 사람들이 전구가 자주 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자 “다시는 여기에 오지 못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전구는 다시 강가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전유와 전구는 모두 연로하였음에도 백발로 울부짖어 애통함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3개월 동안 죽을 마시고 3년 동안 소식(蔬食)을 먹었으며 담제(禫祭)를 지내고 나서도 그 달이 다할 때까지 상복을 바꿔입고 거상(居喪)을 마치지 않았다. 묘소가 집에서 10리가 떨어졌음에도 형제들이 날마다 걸어가서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곡(哭)하고 읍(泣)하여 무릎 꿇는 자리에 풀이 모두 말라죽었다고 할 정도로 부친의 묘소에 자주 방문하였다.
전유, 전완, 전구 삼형제는 스승 송시열의 말을 믿고 따라서 일마다 스승에게 의견을 묻고 행하였다. 송시열이 유배될 때마다 시종(侍從)하였으며 정읍에서 사사하는 명을 받았을 때 걸어가서 곡하였고 9개월 간 심상(心喪)을 지냈으며 삼형제 모두 6년 간 과거 시험에 나가지 않았다.
[묘소]
전유는 유동(留洞)의 을좌(乙坐) 언덕에, 전완은 교동(橋洞)의 간좌(艮坐) 언덕에, 전구는 당산(堂山)의 손좌(巽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삼형제의 장지는 모두 금산 지역이라 전하는데 현재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형수당(荊樹堂)에 전유, 전완, 전구 삼형제가 배향되었다. 형수당은 우암 송시열이 삼형제가 따로 가산(家産)을 경영하지 않고 함께 힘을 모아 밭을 갈아서 배부름과 굶주림을 모두 함께하는 것을 보고 지어준 당호(堂號)였다. 2011년 금산군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