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리 방각골 산신제와 거리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1118
한자 三佳里 - 山神祭- -祭
이칭/별칭 방각골 산신제와 거리제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삼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50년대 -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와 거리제 중단
의례 장소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삼가리 방각골 지도보기
성격 산신제|거리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흘
신당/신체 선돌[삼가리 방각골 거리제]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삼가리에서 정월 열나흘날 산신과 거리신께 마을의 안녕과 질병 퇴치를 기원하며 지냈던 마을 제사.

[개설]

금산 지역의 마을신앙은 산신제와 탑제 또는 거리제가 주류를 이룬다. 금산군 진산면 삼가리에서는 본동인 삼가동과 자연촌인 방각골에서 각각 산신제와 거리제를 지냈다. 삼가동은 현재도 동제를 지내고 있으나 방각골은 오래전에 중단되고 마을 입구에 돌장승만 남아 있다.

[연원 및 변천]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와 거리제는 마을의 형성과 함께 유래된 동제로 추정되나 6·25전쟁 무렵에 중단되어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신당/신체의 형태]

삼가리 방각골 동제당은 산제당과 거리제당으로 구성된다. 상당인 산제당은 마을 뒤편 건박골에 있는 자연제당이다. 따로 신체를 봉안한 당집이나 신목은 없고 단지 상여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를 산제당으로 모셨다. 하당인 거리제당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자연석으로 된 선돌을 수호신으로 모시는데 속칭 장승이라 부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한 주민이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장마로 움푹 파인 도랑에서 끝이 뾰족하게 생긴 돌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괴이하게 생각하여 돌을 꺼내기 위해 밑뿌리를 파 내려가니 커다란 장승돌이 나왔다. 이 사실을 마을에 알려 동네 장정들이 총동원되어 돌을 뽑아 마을 어귀에 세우고 장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의 크기는 높이 148㎝, 밑둘레 110㎝, 중간둘레 122㎝이다.

[절차]

매년 정월 열나흘 저녁에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를 지내고 하산하여 마을 어귀 장승 앞에서 삼가리 방각골 거리제를 지냈다. 이를 위해 정초에 부정하지 않은 가정을 대상으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정결한 사람을 선정하여 제관과 축관으로 삼았다. 비용은 동답 500여 평에서 도지를 받아 충당하였다. 제물은 떡, 삼색실과, 포, 술 등이다.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는 유교식 절차에 따라 분향-강신-참신-독축-헌작-첨작-사신-소지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소지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소지를 먼저 사른 다음 가가호호의 대주소지를 모두 올려주었다. 제관이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를 지내는 동안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나와 풍장을 치면서 가가호호를 돌아 마당밟이를 해주고, 산제당 밑으로 가서 풍물을 울리며 대기한다. 한편 제관이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를 마치고 내려오면 풍물패와 함께 동구 밖으로 가서 장승과 느티나무에 삼가리 방각골 거리제를 지냈다. 집집마다 제물을 차리고 한 해가 무탈하기를 기원하였다.

[현황]

삼가리 방각골 산신제와 거리제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운 선돌형 장승은 없애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비록 마을 차원의 거리제를 지내지는 않으나 주민들은 여전히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정월 열나흘 저녁에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렸다. 근래 삼가리 방각골 거리제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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