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929 |
---|---|
한자 | 改新敎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덕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활동하고있는 장로회, 감리회, 성결, 순복음, 침례회 등의 기독교 분파.
[개설]
개신교[기독교]는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종교의 하나로 불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속종교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대표적 종교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개신교의 유입]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서에 대한 접근 방법과 선교 방법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천주교 신도들은 교회 의식에 좀 더 훈련되어있으나, 개신교 신도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를 알게 된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선교를 하기 전에 먼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전달하는 일에 힘썼다. 따라서 개신교 신도들은 성서를 독습하여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입국하여 잠행을 통한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약을 맺어 정식으로 국교가 열리고,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것을 기다려서 전도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받지 않기 위한 신중한 선교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비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성서를 전달하거나 선교를 한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성서를 전달한 사람은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이다.
바실 홀은 서해안 측량을 목적으로 1816년에 맥스웰(Maxwell) 선장과 함께 왔다. 9월 1일 황해도 백령도와 청도 근방에 못을 내리고 찾아 온 한국인들에게 서양 물건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 물건 속에 성서가 끼여 있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리슨 선교사가 한국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한문성서였다. 바실 홀은 그곳을 떠나 군산만에 도착하여 그곳의 관리들을 만나 역시 서양 물건과 한문 성서를 준 뒤, 다도해역을 순항하였다.
그 후 1866년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가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에서 죽임을 당함으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으로 입국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선교 활동으로는 1870년대 만주를 통해서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파송으로 만주에 와 있던 존 로스(John Ross)는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서 조선 사람들을 만나 한국 상황을 듣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9년에는 백홍준, 이응찬 등에게 세례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세례였다.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 활동이 시작되며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영국, 그리고 간접적으로 일본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에 여러 나라와 교단의 선교사들이 몰려들었다. 아울러 한국교회 내의 간헐적인 수난으로 뚜렷한 선교 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 수난에 대응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1890년 중국 지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1854-1898]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 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이 원칙이 바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초기 한국 선교 활동의 기준이 되었다.
[금산 지역의 개신교 전파]
금산의 장로교 전래 역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하여 한때 전주를 떠났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5년부터 다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였다.
1894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엄 해리슨(W. B. Harison)[하위렴]은 연례 보고에서 1903년에 자신이 순회한 지역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첫 번째 여행은 우리 도의 북쪽에 위치한 다섯 면을 담당했다[고산, 여산, 용담, 함열, 임피], 조사 한 사람과 평신도 한 분이 나와 함께 갔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우리 도의 동쪽 다섯 면을 방문하였다. 그곳은 진안, 용담, 무주, 금산, 진산이었다. 우리는 2주간 떠나 500리를 여행하였고, 464권의 책과 200권의 소책자를 팔았으며, 800장의 팸플릿을 나누어 주었다. 책을 산 각 사람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은 거의 50명쯤 되었다. 전주에서 상거가 175리 정도 되는 곳이 금산인데, 경부선의 철길에 따라 있고[옥천과 혼란을 일으킨 듯 함] 아주 큰 시장도 있다. 우리가 복음으로 점령하기 위해 모든 조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고장이다.”
1903년 5월 경 해리슨 선교사는 자전거를 타고 금산읍을 다니며 노방 전도와 시장 전도를 했고, 전도 책자를 팔며 보급했음을 알 수 있다.
해리슨 선교사의 금산 전도 여행은 금산 복음화의 문을 열게 하는 순례였으며 금산 지역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기회가 되었다. 해리슨 선교사는 1903년 스테이션 리포트의 “1903년 전주선교 거점”에서 자신의 조사 김필수가 1년 동안 고산, 여산, 익산, 함열 지역을 특별히 돌보는 한편 용담, 무주, 금산과 그 인근 지역을 두루 다니며 금산 전도 여행을 했으며, 이 지역에는 현재 복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 전망이 좋다고 밝혔다. 이후 나타난 맥쿠첸(L.O. McCutchen)[1875-1960, 마로덕] 선교사는 호남 지역 선교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1902년 한국에 온 맥쿠첸은 서울에서 어학 교육을 받은 뒤 1903년 전주에 도착하여 20대 미혼의 청년 선교사로 열정을 불태우며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며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1905년 한국교회 대각성 운동이 시작될 무렵 금산읍교회를 세워 1907년에 전라대리회에 가입하였다. 맥쿠첸은 전주 동북부 지역 선교 구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 활동은 무주 지역을 비롯하여 장수, 진안, 남원, 금산, 익산 일부, 그리고 전주 일부까지 담당하였다. 1906년 금산군에 지방동교회, 1907년 금산읍교회를 설립하여 금산 지역 복음화에 앞장섰고 이로써 금산의 개신교는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2008년 조사된 바에 의하면 금산의 개신교회는 124개, 신도수 13,140명, 교직자수 264명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