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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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덕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제반 신앙 활동의 총칭.
[개설]
금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한 지역적 특색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천년을 이어오고 있으며 전통적 학풍을 가진 학자들의 강학 활동으로 서원과 사우가 발달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 천주교 최초의 순교가 일어난 종교적 성지이기도 하다. 2008년 조사된 바에 의하면 종교 활동 인구가 약 8만 여명, 교직자는 403명에 이르렀다. 2007년 당시 금산군 인구가 58,583명에 불과하였지만, 등록된 신도수가 더 많았던 이유는 금산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에 타 지역의 불교 신도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2023년 현재 금산군 인구는 50,314명으로 15년 전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새로운 종교와 시설의 확장으로 신도수의 변화는 거의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조선 후기부터 새로운 종교가 많이 일어나 교세를 확장하고 있으나 오랜 역사를 가진 외래종교의 교세에 크게 미치지 못하여 이곳에서 다루지 않았다.
[불교]
금산 지역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백제 제15대 침류왕 때에 마라난타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불교를 전한 이후이다. 그러다가 성왕 때부터는 백제 불교가 신라 불교 이상으로 번성하였다. 백제 시대 금산 지역의 사찰로는 월봉사, 보통사, 탑선사 등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불교는 교종 계열의 열반종, 법성종이었고, 통일 신라 시기 이후에 선종이 들어오게 되었다. 신라 46대 문성왕 대에 무염(無染)국사가 당나라에 가서 당의 고승 마곡보철에게 불법을 전수한 후 돌아와, 전국 각지에 선종을 포교하고 사찰을 지었는데, 금산에도 신음산의 신안사, 천비산의 미륵사, 서대산의 서대사, 만인산의 봉접사 등이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때에 원효대사가 대둔산에 와서 수도하면서 대둔사와 태고사, 안심사, 석천사 등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계의 특기할 사실은 영규대사와 수백명의 승군이 청주의 왜적을 정벌하고 금산에 침입한 왜적을 저지하기 위해 연곤평 전투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일이다. 이에 의선각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승장비를 보석사 경내에건립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금산 지역의 사찰에서는 고승이 배출되어, 천태종에서는 사명당의 수좌였던 태고사의 진묵대사[선조~광해군]와 조계종에서는 풍수지리에 뛰어났던 서대사의 법풍대사[영조~정조]가 나왔다.
일제 강점기에서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전국의 1,300여 사찰을 31대 본산으로 만들어 행정적으로 불교에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원종종무원이 양종을 선교양종종무원으로 개편하였다. 이 때 진락산의 보석사가 31대 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일대 사찰 운영의 전권을 지니고, 그 이외의 작은 사찰들을 모두 예속시켜 재정, 인사권을 전담했다.
또한 이 시기의 불교계는 서울의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정하고 포교에 주력하여 지방에도 포교당을 건립하였는데, 금산읍 상리에 있는 불교포교당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23년 현재 금산 지역의 사찰은 34개, 선학원으로 5개소가 있고 그 외 종파를 구분하지 못한 사찰이 더 있다.
[유교]
금산의 유교 문화 전통은 남다른 바가 있다. 조선 전기에는 김종서가 살해당하자 김종서의 형인 김종환 일족이 금산에 옮겨와서 향당의 유생들을 교화하였다. 중종 기묘년에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사화를 당하자 김정이 형조판서로 재직하다가 금산으로 유배되었던 적이 있다.
17세기 이후, 시남 유계와 미촌 윤선거가 남일면 마하산 아래에 산천재서원을 개설하였고, 윤선거 이후 그 아들 명재 윤증이 산천재서원을 계승하였다. 이때 초려 이유태도 고향인 금성면 유곡에 내려와 초려서원을 개설하고 교육하기도 했으며, 영조 때에는 김원행이 유배되어 와서 용강서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현재 금산군 내에 소재하는 유교 문화 유적으로 향교는 2곳, 서원은 유허지를 포함하여 11곳이 전하고 있다.
[천주교]
조선 후기 서양 문물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의 단계로 발전해간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조선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끊임없이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받아들인 이 새로운 종교는 수용되자 마자 충청도의 내포와 진산 지역에 전해졌고 그곳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금산 지역의 천주교회는 1926년 금산군 지방리 가새벌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1935년에 중도리로 옮겼다. 금산은 천주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1791년에 윤지충과 외사촌인 권상연이 제례 문제로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던 신해박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역사가 되었다.
2023년 현재 금산읍에 대전교구 소속 금산성당이 있으며, 추부면에 공소 1개소를 두고 있다. 2008년 천주교 대전교구는 지방리공소와 백암리공소를 금산성당으로 부터 분리하여 지방리공소를 진산성지성당으로 승격하고 예하에 백암리공소를 두었다. 2023년 현재 진산성지기념성당을 신축하고 진산성지성당은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교통편 편리와 본당 집중현상으로 진산성지기념성당 신축과 함께 백암리공소는 사실상 폐쇄되었다.
[개신교]
1882년에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장로회와 감리회의 양파가 교파간의 알력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전국 각도를 나누어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약정하였다. 장로회도 남북 장로회가 있었고 감리회도 남북 감리회가 있어서, 전라북도는 남장로회가 담당한 선교 구역이었고, 충청남도는 북감리회가 담당한 선교 구역이었다. 금산 지역은 1903년 해리슨 선교사의 전도여행으로 복음화의 문을 열었으며 1907년 영적 대각성운동 이후 개신교의 활발한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23년 현재 금산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곳은 설립 120여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소속 금산제일교회이다. 금산 지역 개신교회 수는 2008년 기준 124개이며 현재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
[원불교]
금산 지역의 원불교 교화사업은 1959년에 김청룡의 주도로 포교하기 시작하여, 제원면 제원리에 원불교 분회가 설립되었다. 금산읍에도 김태국의 주선으로 1959년에 원불교 분회가 중도리에 설립되었고, 1967년에 금산읍 상리에 원불교 분회를신축했다. 1985년 당시 포교 현황을 보면, 금산교당은 신도수 420명, 제원교당은 신도수 85명, 추부교당은 신도수 194명을 기록하고 있다.
2008년 조사된 금산 지역 원불교 교당의 소재지, 신도수 현황은 금산교당[금산읍 상리, 105명], 제원교당[제원면 제원리, 190명], 추부교당[추부면 마전리, 55명] 등 교당이 3곳이며, 신도수는 모두 35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