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909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지송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활동하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백제 시대]

금산군에는 백제 제15대 침류왕 원년 9월에 호승 마라난타(摩羅難陀)[인도 승려]가 중국의 진나라로부터 들어와서 불교의 전래가 비롯하였고 궁중 불교로 시작하여 도시 불교로 번져갔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중에 머물게 하여 불법을 설교받고 귀의[믿고 따른다는 뜻]하여 그 익년 봄에 한산주[지금의 경주]에 사찰을 짓고 마라난타를 이곳에 머물게 하여 10여 인의 불도를 양성하였다.

이들이 도시로 나와 포교에 종사하면서 사찰을 지었고 마라난타는 왕에게 간청하여 수열암을 짓고 미망인들 중에 개가를 원하지 않는 부녀자를 모아서 녹(祿)을 주어 불교를 신봉하게 하는 한편, 포교에 전심(專心) 치성(致誠)하니 불교는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역대의 임금이 모두 불교의 오묘한 신비력에 감복하여 439년 아화왕 원년에는 교서까지 내려 국교처럼 전국민에게 불교 신봉을 권장하여 국민들은 이에 호응하며 성왕 때부터는 신라의 불감 이상으로 대성하였다.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불교 신봉을 권장하여 국내로는 제종의 석덕(碩德)[덕이 높은 승려]이 배출되었다. 도시 불교로 각 고을 읍 근교에 사찰을 지어, 이 당시 금산 지역의 사찰로 월봉사, 보통사, 탑선사 등이 현재 금산읍 근교에 불교 포교와 금산 지역민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때의 불교는 교종의 열반종, 법성종이었고,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선종이 금산 지역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선종에도 북선종과 남선종으로 종파가 있어 선종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이 있었지만 교종과 상대 포교로 불교 발전에 큰 역량을 보이게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 46대 문성왕 대 승려인 무염(無染) 국사(國師)[801~888]는 우리나라 불교 선종을 포교하는데 석덕을 지녔다. 무염은 공주인으로 속성이 김씨이고, 신라 무열왕의 팔대손이며, 호는 무주(無住)라 하였고,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 불렸다. 13세에 출가하여 부석사 등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당나라에 들어가 당시 당의 고승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 불법을 전수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고승과 고행으로 해탈의 도를 닦으니 중국의 불교 정도들은 무염을 ‘해동보살’이라고까지 불렀다. 무염은 문성왕 7년에 귀국하여 김양(金陽)의 청으로 웅천조합사[지금의 성주사]에 있으면서 선종을 크게 포교하니 문성왕이 조합사를 성주사라고 칭하고 성주산문(聖住山門)에 개산조(開山祖)[하나의 파를 처음 형성한 승려]가 되었다. 이에 무염을 시호(諡號)하여 ‘낭혜(朗慧) 국사(國師)’라고 불렀고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무염 국사는 성주사에 머무르며 전국 각지에 선종 포교와 아울러 사찰을 지었는데, 금산 지역의 신음산 신안사와 천저산 미륵사, 서대산 서대사, 만인산 봉접사 등이 무염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금산 지역민의 교화로 상보사은(上報四恩)과 하제삼도(下濟三道)의 종지를 널리 보급시켜 정신수양의 대도를 걷게 하였다.

이처럼 선종이 들어와 도시 또는 궁중 불교이었던 교종 불교도 산간 불교로 삼법인(三法印)의 열반정적(涅槃靜的)을 위주로 하여 명산의 유수경을 찾아 사찰을 짓기 시작하였다. 신라 헌강왕 12년에 조구화상이 진악산에 들어와 보석사영천암, 원영사 등을 창건하여 교종의 열반종, 화엄종, 법성종을 포교하였고 신라 하대의 불교는 황금시대의 불교 융성기가 되어서 고승 석덕들이 전국 각지를 고행하며 종지로 삼는 상보사은과 하제삼도의 승도를 수행하여 제세구민의 교화로 금산 지역민을 고해[생사병노]에서 해탈의 길을 열어 주었다. 신라 신문왕 때에 원효대사는 금산 지역에서 고행 수도하면서 대둔산에 대범사와 태고사, 안심사, 석천사 등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사찰이 일시에 석덕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 속에 불교도들의 감화와 시주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 시대의 불교 신도들이 불교에 대한 정성과 신앙의 척도를 상상할 수 있으며, 당시의 불교는 금산군민의 정신적 양식이며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문학, 운술, 도덕, 사회생활을 규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본다면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불교의 회심곡(回心曲) 같은 문학은 향가처럼 불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는 불교문학이며,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회심곡은 지금까지도 애송 애창되고 있다.

[고려 시대]

불교를 시기별로 나누면 삼국 시대는 불교의 아생기, 통일 신라 시대는 성장개화기, 고려 시대는 결황기, 조선 시대는 풍낙기로 네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 시대는 불교의 성장개화기였기에 금산 지역민은 불교에서 낳고, 살고, 늙고, 죽고, 일하고, 즐겁게, 놀았다. 그러므로 국수(國粹)[나라나 국민이 지닌 고유한 장점]도 민의도 불교였고 여기에서 사문(沙門)[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 석덕이 많이 배출되었고 민중도 사문 석덕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태조 왕건이 십대훈요 중에서 국태민안은 제불(諸佛) 호위의 힘이라 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리하여 불교는 국제적 외교에까지 이르렀고 불교 서적이 우리나라에 대량 수입되었으며 불교의 발전은 전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승과를 두어 석덕의 관직까지 마련하였고 국녹까지 지급하였다. 또한 국가에 외환내요가 있어도 불법의 힘을 빌려 이들을 격퇴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팔관회, 연등회를 열어 불사에까지 이르렀으니 얼마나 그 시대의 불교의 법력에 의존하였던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결실기의 고려 말엽에 이르러 충렬왕 때에 문성공 안향(安珦)가 송나라에 가서 주자학[성리학]을 수입하여 유학의 법도를 세우면서 거유교, 백이정, 우택, 권박, 이제현, 이곡, 이색,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은 숭유척불(崇儒斥佛)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호위로 불교를 이어갈 수 있었으나, 신돈이 구축되자 불교의 연명은 경각에 있게 되었다. 각덕(覺德) 고승인 뇌옹, 태고, 무학 같은 이들도 법운을 만회하지 못한 채 결국 국조가 바뀌고 말았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는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설하는데 참여한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이념에 기반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전락기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대사는 승병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당시 수법인(修法人)이었던 사명당은 일본에 사신으로 들어가 일본 관백을 설복시키는 한편 수천인의 포로 동료를 구출하였으며, 영규대사는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의 승병으로 청주의 왜적을 정벌하고 우리 고장인 금산의 왜적을 평정하려다 안타깝게도 와여평(臥餘坪)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입적하였다. 이에 영규대사와 인연이 깊은 보석사의선각(毅禪閣)영규대사의 위패와 선사 아홉 분의 영정을 모시고 경내에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를 건립하여 기리고자 하였다.

조선 시대의 불교 배척 정책은 굳건하여 폐사 또는 빈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인종 25년에 간행한 『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금산에 총 14곳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사찰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전락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 시대 금산 지역에는 태고사의 진열대사, 서대사의 법풍대사 등 덕있는 명승(名僧)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금산 지역민의 교화 뿐만 아니라 삼미지(三味智)를 겸전하여 조선 전체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덕승으로 인정받았다. 진열대사는 천태종을 수덕하며 서산대사의 수법이자 사명당 유정 대사의 수좌로서 활동하였다. 법풍대사는 선종을 수법하여 당대의 지리 음양에 투철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및 해방 이후]

1911년 한일병탄 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내려 전국 1300여 사찰을 31대 본산으로 만들어 행정적으로 불교에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원종종무원이 중앙 기구를 선교량종종무원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금산군에서는 진악산보석사가 31대 본산의 하나인 사찰로 지정되어 주지(住持)가 전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작은 사찰들은 모두 예속시키는 동시에 재정의 처분 인물의 진퇴 등을 전담하고 관청의 지휘 감독에 들어가 옛날의 자유롭고 공결한 미풍이 말살되었다.

여기에 1910년, 서울의 각황사를 중실 포교당으로 정하고 도시 불교로 들어 불교교화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지방에도 포교당을 건축하게 하였다. 승려의 출입조차 금지되었던 서울 도심 한가운데 사찰이 세워진 점, 불교 종단이 건립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금산읍 상리에 있는 불교포교당도 이 시기에 창건된 사찰이다. 1936년에는 서울에 태고사를 건축하고 총 본산을 만들어 조한종으로 개칭하여 종헌을 반포하여 참신한 불교 운동으로 경전 번역, 도제 양성, 교육 진흥, 문화재 보호, 대중 교화 등에 힘쓰다가 1945년의 해방과 더불어 사찰령의 기반에서 해탈한 불교는 현대에 적응한 사업으로 육영사업, 자선사업으로 금산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포교당] 보석사에는 대자애육원[고아원]을 설치하였다.

[현대]

현재 금산 지역에는 오랜기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 사찰 네 곳[태고사, 신안사, 보석사, 미륵사]을 포함한 20여 곳의 사찰이 있으며, 다양한 포교 활동 및 사회공익적 가치 실현에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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