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술(金學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98
한자 金學述
이칭/별칭 김용술(金用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기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11월 14일연표보기 - 김학술(金學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2일 - 김학술(金學述)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8일 - 김학술(金學述) 징역 1년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32년 3월 27일연표보기 - 김학술(金學述)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김학술(金學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학술(金學術)[1897~1932]은 1897년 11월 14일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용술(金用術)이다. 1919년 2월 양봉식(梁鳳植)이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정춘수(鄭春洙)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옥천, 무주, 금산 등지에 배포한 것을 계기로 금산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서서히 일어났다. 이후 임승환(任勝煥)이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고향 금산으로 내려오면서 만세 운동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김학술임승환상옥리 김학술의 집에서 각 면 대표 20명과 함께 만세 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우선 금산읍 금산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장을 시작으로 시가지를 돌며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헌병대까지 행진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김학술임승환과 함께 「금산경고(錦山警告)」라는 격문을 지어 시위 현장에 배포하기로 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바야흐로 세계열강은 각각 적극적인 행동으로 성립하고 있다. 아 조선은 건국 4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 문명의 자격과 인의(仁義)의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강제정치에 온작 신산고초를 맛보고 있는 연유는 무사안일을 탐하고 우매한 사상과 매국적자(賣國賊子)가 발호함에 있으니 동포 청년은 이들 간흉한 적자의 행동을 본받지 말고 인도를 주창하여 압제정치하의 금수생활을 모면코 독립적 자유 활동을 하겠다는 뜻이 있는 동포는 오늘 하오 2시 반 장터로 나와 함께 행동하자.”

「금산경고」는 금산면 면서기로 근무하던 김종구(金鍾九)가 맡아서 150장을 인쇄하였고, 3월 22일 아침 구호열(具鎬烈)변희조(卞熺朝) 등 다른 주모자들이 시장에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학술임승환은 오후 2시에 금산 읍내 시장에 들어가 ‘대한민국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만세 운동이 시작되고 시장에서 사람들의 호응으로 참여자가 늘어나 활기를 띠자, 금산읍 헌병 분대가 긴급 출동하였다. 헌병 분대는 공포탄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만세 운동을 벌이는 민중들을 해산시키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김학술임승환 등의 주도자와 함께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김학술은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보안법과 출판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3월 27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학술은 2009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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