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57
한자 李惟泰
영어공식명칭 Lee Yutae
이칭/별칭 초려(草廬),태지(泰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이유태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84년연표보기 - 이유태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공조참의|동부승지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이유태(李惟泰)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초려(草廬), 자는 태지(泰之)이다. 이유태는 1607년 충청도 금산군 노동리(蘆洞里)에서 태어났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그 관계가 깊어 김장생이 금산에 방문하여 강론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공부하면서 금산 지역에서 만남을 가졌으며, 진산에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분황례(焚黃禮)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이후원(李厚源), 윤순거(尹舜擧), 윤문거(尹文擧), 유계(兪棨) 등 당대의 문인들이 이유태와의 교류를 위해 금산 지역에 방문하였다.

[가계]

이유태의 할아버지는 선공감봉사를 지내고 승지에 증직된 이대승(李大升)이고, 아버지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이후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서(李曙)이다. 형제로는 이유택(李惟澤), 이유겸(李惟謙), 이유부(李惟孚)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이유태는 1649년에 대신들이 덕망있는 인물을 중앙에 초청할 것을 건의하는 가운데 김집, 송준길, 송시열, 권시와 함께 이름을 올려 천거되었다. 어머니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1649년 6월 공조좌랑에 임명되었고, 곧 붕당의 폐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송준길,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유계와 함께 관직에 제수되어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진선, 승정원 동부승지,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초년에 시폐를 논하는 만언소를 올렸고, 이후에도 양전, 궁가 면세전의 혁파 등을 주장하였지만 채택되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1674년 갑인예송 당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남인의 탄핵을 받고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유태는 복제 논쟁과 관련하여 자신이 예를 그르쳤음을 뉘우쳤다고 하여 1680년에 서용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의 죄인이 되어 천하의 비방을 받게 되었고, 관직에 복직되지는 못하였다. 『초려집』에 따르면 이유태가 여러 형제들과 함께 금산 지역에서 문회당을 건립해 경서를 보관하고 강학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이유태가 남긴 시문을 모아서 1865년 후손에 의해 간행된 『초려문집(草廬文集)』이 전해진다. 1973년 누락된 것을 첨보하여 『초려전집(草廬全集)』이 간행되었다.

[묘소]

현재 세종특별자치시에 복원된 이유태 배향서원인 갈산서원에 이유태의 묘소와 함께 부인 평산 신씨의 묘소, 이유태의 손자인 이경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고종대 영의정 이유원이 이유태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문헌(文憲)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유태를 제향한 서원으로는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339-4에 위치한 용문서원과 세종특별자치시 도움1로 40에 위치한 갈산서원[복원]이 있다. 용문서원은 1986년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가 만년을 보낸 공주에 이유태의 배향 서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세운 곳으로, 이유태와 관련된 유물 및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갈산서원은 이유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대 건립되었다가 철페된 서원을 복원하여 같은 자리에 세웠다. 갈산서원에는 이유태의 묘소, 부인 평산 신씨의 묘소, 이유태의 손자인 이경의 묘소 총 3기의 묘소가 있다.

한편 이유태를 배향하기 위해 금산군 금성면에 세워진 초려서원[또는 반계서원]은 영조대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철폐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그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