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37
한자 吳達輝
영어공식명칭 Oh Dalhui
이칭/별칭 효여(孝餘),화락당(和樂堂)
분야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
성별
본관 해주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 거주한 조선 후기 효자.

[개설]

오달휘는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효여(孝餘), 호는 화락당(和樂堂)이다.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이 ‘화락당’ 세 글자를 써주어 문미에 걸어두었는데, 이것이 호가 되었다.

[가계]

오달휘해주 오씨 시조인 오인유(吳仁裕)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 봉사 오억수(吳億壽)이며,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오산립(吳山立)이다. 아버지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자 효자로 정려된 오국헌(吳國獻)이다. 오달휘의 형제는 연휘(延輝), 수휘(遂輝), 일휘(逸輝), 건휘(建輝)가 있는데, 모두 효우로 소문이 났으며 관찰사나 어사에게 보고되어 하사미나 복호(復戶)를 받기도 하였다. 오달휘는 안동 김씨 김석남의 딸과 혼인하여 오한규(吳翰奎)를 낳았다.

[활동 사항]

오달휘는 아버지인 오국헌의 효우(孝友)와 덕업(德業)을 계승하지 않으면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동생들과 서로 경계하였다. 어머니의 종기가 썩어 문드러지자 자신의 다리를 잘라붙였고,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졌을 때에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머리맡에서 흘려주었으며, 밤마다 목욕재계를 하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동생들과 함께 무덤을 지켰다.

[학문과 저술]

오달휘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그만두고 경사(經史) 연구에 몰두하여 학식이 넓고 높았다.

[묘소]

오달휘의 묘소는 경상도 증봉(甑峰)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에 오달휘를 비롯하여 아버지, 형제, 후손 등 총 9명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가 건립되었다. 정려는 금산 요광리 오국헌 정려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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