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30
한자 吉安壽
영어공식명칭 Gil Ans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길안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3년 -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 건립
성격 임진왜란 의병
성별
본관 해평(海平)
대표 관직 승지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

[개설]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야은 길재의 5대손이다.

[가계]

금산은 고려 말 성리학자인 길재의 부인의 고향이기도 하며, 길재의 부친 길원진금주[금산] 임지에서 별세하자 길재가 시묘살이를 한 곳이기도 하였다. 금산군 부리면야은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불이리(不二里)’라고 이름 지은 것이 지명의 유래이다. 또한 야은 길재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지방유림이 춘추 향사하는 청풍사를 건립하였으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백세청풍비를 세웠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부리면에는 길재의 후손들이 많이 살게 되었고, 이 가운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이 바로 길재 선생의 5대손인 길안수였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났다. 왜군은 15만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북상하기 시작해 상륙한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가운데 금산에서 활약한 인물은 조헌이었다. 조헌은 호서 지역에서 의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선조를 지키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고자 하였으나,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이 금산의 왜군을 토벌할 것을 권유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의견이 맞지 않자 조헌은 칠백의사를 이끌고 왜군과 싸우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였다. 8월 18일 조헌과 칠백의사는 연곤평 전투에서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순절하였다. 이 전투에서 길안수와 아들 길서춘도 함께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1592년 8월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이 칠백의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칠백의총(七百義塚)을 조성하였다. 1603년 4월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를 건립하였고, 1634년 금산군수 김성발과 제원역찰방 조평의 발의로 순의단(殉義壇)을 설치하고 제향하였다. 1647년 호서·호남 지방과 금산의 유림들이 사당을 건립하였고, 1663년 현종이 ’종용사(從容祠)’라고 사액하고 제사지낼 때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땅을 하사하였다. 조선 시대에 승지로 추증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인 금산경찰서장이 칠백의총종용사를 훼손하고 순의비를 폭파하였다. 해방 이후 1952년 금산군민이 순절 36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아 의총을 고치고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63년 1월 21일에는 국가에서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였고 1971년 4월 13일 제1차 정화사업, 1976년 9월 20일에 제2차 정화사업으로 현재 모습을 완공하였다. 2009년 9월에는 일본이 폭파한 순의비[몸체와 머릿돌]를 복원하였고 순의비각을 목조양식으로 개축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